교사의 진심이 오해받는 시대

미국에서 바라본 학교의 아이러니

by 어쩌다 초등교사


한국 초등학교에서는 정량적인 평가는 배제되고 있다. 즉, 예전처럼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우미양가 등의 점수로 나오는 평가는 실시하지 않는다. 대신, 과정 중심의 평가를 강조하여 성적표는 교사의 소설과도 같은 서술형 평가, 소위 ‘쫑알이’로 꽉 채워져 있다. 교사 입장에서는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전 과목에 대한 평가를 쓰느라 너무 힘든데, 학부모 어느 누구도 이 엄청난 글을 읽고 아이에 대한 교육 계획을 수립하지는 않는다. 그냥 아이에 대한 참고자료 정도로 여길 뿐이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구성주의적 교육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구성주의 교육은 학생이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는지, 그 과정의 사고 흐름에 초점을 둔다. 이 철학이 학교에서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사가 아이의 지적 과정뿐 아니라 정서적 과정에 까지 깊숙이 관여해야 한다. 권위를 가지고 무게감 있게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교권붕괴라는 아이러니를 겪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누구의 책임일까?


구성주의적 교육철학은 학교 안에서만 실현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예전과 지금의 교육 환경은 매우 다르다. 학교의 권위와 위상이 예전보다 명확히 낮아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사회가 매우 빠르게 변하고 다양한 가치를 포괄하고 있어, 하나의 교육 기관이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사회의 모든 요구와 기대를 다 포용할 수 없다. 학교는 아이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여러 기관 중 하나일 뿐이다. 이는 한국도 미국도 동일하다. 학부모는 학교뿐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통해 아이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교육의 주체는 사회, 학교, 그리고 가정 모두의 몫이다.


미국의 학부모들에게 학교의 제 일 기능은 보육이다. 부모가 못 돌보는 동안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어린이집처럼 아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얼굴 닦아주고 머리 빗겨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순간도 아이에게 눈을 떼서는 안 되고, 아이의 안전에 교사와 애드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심혈을 기울인다. 심지어 화장실도 반 전체가 함께 움직인다.


그다음 중요한 학교의 기능은 학습이다. 미국의 학부모들은 주로 학습에 대한 자료를 학교에서 취득한다. 아이가 곱셈을 어떻게 하는지, 뺄셈에 어려움이 없는지, 읽기의 정확성과 유창성은 어떠한지 등, 학습 전반의 발전을 학교에 기댄다. 교사는 전국단위, 주단위로 시행되는 리딩, 매쓰에 대한 정량적인 진단, 평가 자료 및 학습결과물과 같은 정성적인 자료를 동원하여 아동에 대한 상담을 실시한다. 만약, 교사 개인의 역량으로 아이에 대한 세심한 지원이 불가능한 경우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다. 미국은 평가 결과에 따라 전 학생을 tier 1, 2, 3로 나누고, 필요한 경우 세심하게 개입을 하여 담임에게 학습 결손의 책임을 모두 전가하지 않는다. 영재도 그에 맞는 지원을 받는다.


학교 밖 교육도 활발하다. 방과 후엔 체력을 기르기 위한 스포츠에 정말 진심이다. 악기 교육도 활발히 하고, 방학에 개설되는 사설 캠프도 다양하다. 지덕체 모두를 중시하며, 학교 하나에 목매지 않는다. 물론 어려움도 당연히 있다. 교육에도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적용되어, 저소득 가정의 경우 경험의 폭이 매우 제한된다. 사실, 이런 부분은 한국이 정말 저렴하고 우수하다. 또한 한국의 학부모들도 미국 부모들 못지않게 학교 밖 교육을 정말 치열하게 실시하고 있다.


정량적 성취 위주의 학습과 보육만을 전담하기에 미국에서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한국만큼 높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동의 전인적 성장이라는 엄청난 책임과 권위를 부여받은 한국의 교사들은 지금 엄청난 고충을 겪고 있다.


한국의 학부모 어느 누구도 본인의 자녀를 평가함에 있어 교사의 통찰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이 사회에는 아이들을 파악할 수 있는 엄청나게 많은 채널이 있고, 학부모는 그 모든 자료를 통합하여 자녀를 위한 최선의 방향을 모색한다. 많은 엄마들은 유명 사설 학원에서 아이들의 학습 실력을 평가받는다. 소위 ‘레벨테스트’를 통하여 아이의 수준을 파악하고, 그 수준에 맞게 알맞은 학원을 골라 선행학습을 실시한다. 엄마들끼리 그룹을 짜서 아이들 튜터를 따로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는 학교의 ‘수행평가’ 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 줄넘기와 같은 사소한 기능도 과외를 한다. 즉, 꼭 필요한 진단과 교육을 학교 밖에 의지하고 있는데, 학습에 대한 결과 보고는 학교로부터 받는 구조이다. 과정을 중시하는 교육은 이상적이지만, 수행평가만으로는 아이의 현재 수준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학부모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아이의 현재 상황을 알고 싶고 대처하고 싶은데, 학교는 과정중심 교육이라는 이념에 따라 아이의 현재 수준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혹여 선생님이 아이의 ‘정성적’인 측면에 대한 평가가 나의 생각과 어긋나면 화가 나기도 한다. 도대체 당신이 뭘 알아, 혹시 내 아이를 미워하는 거 아니야?


나는 교사이기에 아이들에 대한 눈이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문제를 푸는 양상을 보면 이 아이의 수학적인 감각이 보이고, 글감을 다루어내는 솜씨를 보며 남다른 창의성을 엿볼 수 있으며, 친구들 사이의 갈등을 침착하게 중재해 내는 모습을 보면서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다. 반면에, 국어 시험은 100점을 맞는 아이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갈등하는 장면을 목도하며 아이의 언어적 소통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기도 하고, 달달달 공식을 외워 수학 100점을 맞지만 구체적 문제 해결 상황에서 헤매는 모습을 보며 응용력을 보완할 필요를 느끼기도 한다.


교사의 정성적 판단이 공감을 얻으려면 교사와 학부모간에 엄청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정성적 판단의 근거 자료 확보는 매우 까다롭다. 섣불리 소통했다가는 엄청난 갈등을 초래할 수 있기에, 그저 아이에 대한 공허한 칭찬만 나누게 되고, 학부모는 아이의 상태를 고등학교 모의고사를 치는 순간 확인하게 된다. 그땐 이미 너무 늦다.


그렇다면 학교는 어떤 장소여야 할까? 나는 학교는 철저하게 학습을 전문적으로 실시하고 그 결과를 정량적, 정성적으로 분석하여 내놓음으로써 그 타당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진단평가, 형성평가를 실시하여 아이의 학습 수준을 객관적인 지표로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청과 학교는 학생들의 다양한 니즈에 맞춘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대책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tier를 나누고 각 tier별 전문가를 개입시키는 방법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한국도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훌륭한 인재가 많은 한국은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이런 방식이 과도한 경쟁과 입시위주의 교육을 부추긴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유아기부터 영어유치원, 7세 고시 등 이미 학교밖에서 입시를 향한 과도한 경쟁 중이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사회 구조적 문제이지 학교가 무엇을 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학교는 아동의 발달과 성장 분야에 대해서는 탈권위 하는 중이다. 학부모들은 수많은 매체에서 아동발달, 심리, 사회성에 대한 정보를 얻고, 다양한 렌즈로 아이를 통찰한다. 학교가 이상적인 철학으로 비현실성을 추구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 명확하게, 아이의 ‘학습’에서 만큼은 가장 신뢰성 있고 타당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권위 있는 기관이어여 한다. 정량적 평가가 중심이 되어 정성적 평가를 가미하여 정말 통찰력 있는 학습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 아니면 안 된다는 그 존재가치를 답보할 수 있고, 학부모가 의지할 수 있다.


한국 선생님들의 지적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학교 선생님들의 훌륭한 지적인 능력이 사회의 요구에 걸맞게 제대로 쓰이기를 바란다. 선생님을 몇몇 엄마들의 감정의 배출구로 만든 건 처신을 못 한 선생님 책임도 아니고, 혼란스러운 엄마들 책임도 아니다. 시스템을 이렇게 비현실적, 비실용적으로 만들어 놓은 당국의 책임이다.


학교에서 교사가 아동들의 사고과정, 발달 수준, 정서상태까지 전인적으로 바라보며 교육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의 사회흐름과 너무 큰 괴리감이 있다. 학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학부모가 가장 원하는 것, ‘학습’을 제대로 시켜주면 정말 좋겠다. 구성주의적 교육철학은 교사, 학부모, 사회가 상호보완적으로 총체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과업인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Meet and Gr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