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예술작품으로서의 삶, Life as a work of art

by 루이보스J

예술을 만드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 꽤 오랫동안 결국 사람은 둘 중 하나에 해당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읽는다 해도 다 못 읽을 고전 명작,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을 것 같은 천상의 음악, 그림, 조각… 인류는 항상 예술을 창조하는 소수와 이를 소비하는 다수로 존재해오지 않았나.


이미 뛰어난 예술이 넘치는데도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무모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대범함이 한없이 부러웠다. 열한 살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처음 소설가를 꿈꾸었다. 그 이후 한 번도 그 꿈을 놓지않고 국문과에 들어갔다. 그런데 소설 창작 수업에서 B-(지금 돌이켜 보면 아주 나쁜 점수도 아닌데)를 받고 그 꿈을 놓아버렸다. 통역이라는 다른 일을 하게 되었지만 근원적인 욕구가 해소되지 않은 듯 불만족 감을 안고 살아왔다. 억눌러도 억눌러도 다시 고개를 드는 표현 욕구에 뭔가를 좀 끄적여봤지만 매번 내 글쓰기 연장이 얼마나 조악한지 확인할 따름이었다. 예술은 소수의 창작자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니 나는 그저 예술 소비자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가.


예술이 어떤 의미인지 사전적 정의를 보자.


예술: 미적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활동, 표현적인 창조활동


여기서 핵심은 ‘표현적인’ ‘미적’ ‘창조활동’이다.


생각, 느낌, 관점을 표현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모두 예술이다.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고, 춤을 추는 것만 이 예술이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도 얼마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


무엇이든 최상의 것을 경험하면 ‘예술이다’라고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매일 생각, 느낌, 관점을 표현한다. 말으로든, 옷을 입는 방식이든.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로 우리는 예술가인 셈이다.


존재방식


태어나서 처음으로 유명인의 팬클럽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한창 연예인들을 선망하는 십 대 때가 아닌 삼십 대 초반의 일이다. 한 동안 성북동 아저씨한테 푹 빠졌다. (성북동에 사시는 분이라 나는 혼자 ‘성북동 아저씨’라고 불렀다.) 지금도 라디오 청취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시사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다. 아저씨가 하는 방송 녹화장에 방청객으로 참여하기도 하고 아저씨가 운영하는 카페에도 자주 갔다. 아저씨의 호방함, 통쾌함,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움이 좋았다. ‘그렇게 막사는 사람이 대체 뭐가 좋으냐’고 핀잔을 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생각이 달랐다. 우리나라처럼 대다수가 정해진 인생의 수순을 밟으며 판에 박힌 삶을 살아가는 환경에서 저렇게 개성 넘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아저씨와 팬과의 모임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종종 멀리 서라도 아저씨를 볼 수 있었지만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거기 없었다. 그런데 카페에서 아저씨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이삼십 대 여성이 대다수였던 팬들은 설렘으로 다들 상기된 얼굴이었다. 드디어 아저씨가 등장하고 우리는 환호했다. 아저씨는 머쓱해했지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 기특하면서도 고마운 듯했다. 이런저런 질문과 답이 오가며 유쾌한 시간이 이어졌다. 그때 누군가 아저씨의 여자 친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당시 아저씨는 역대 최고의 TV 드라마 중에 하나로 기억되는 <네 멋대로 해라>의 작가와 공개 연애 중이었다.


팬 질문: 작가님의 어디가 좋으세요?


결혼 전이었던 데다 아저씨에 대한 연심이 가득했던 나도 귀가 쫑긋해졌다.


아저씨 답: (조금의 지체도 없이) 그 친구의 존재방식이 맘에 들었어요.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그때까지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 또는 배우자의 어떤 면에 끌렸냐는 이 식상한 질문에 이보다 더 멋진(또는 난공불락)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다. 동시에 그때를 계기로 아저씨에 대한 연심을 완전히 접었다. ‘웃는 얼굴이 예뻐서, 똑똑해서’ 이런 대답이었다면 부질없을지언정 아저씨에 대한 여자로서의 팬심을 꺾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재방식이 좋아서’는 비집고 들어갈 틀이 없었다. ‘깨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라고 광고하는 도자기같이.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아저씨한테 느낀 매력이야말로 다름 아닌 그의 개성 있는 ‘존재방식’이었다는 것을.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존재방식’은 나에게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어떤 방식이든 각자의 존재 방식을 만들어갈 수 있다.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존재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내가 원하는 존재 방식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시작으로 내 삶을 총 점검하기로 했다.


어떻게 내 삶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릴 것인가?

무엇이 내 삶이 ‘예술’이 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가?

더 늦기 전에.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