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l begun is half done.
'A moment that changed my life forever'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순간), 영어책을 읽다 보면 종종 만나는 문구다. 과장된 표현 아닌가? 어떻게 짧은 찰나의 순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2002년 6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던 라디오 PD 시험에서 떨어지고 을지로에 위치한 대형 로펌 국제부에 입사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퇴근 후에 다 같이 모여 맥주를 마시며 그날 예정된 경기를 단체 관람하기로 되어있었다. 그해 6월 한 달간은 사실상 전 국민이 단체관람 중이었다. 대한민국팀의 경기가 있는 날은 을지로부터 광화문 일대는 붉은 악마들의 물결로 넘실댔다.
내가 속한 국제부는 로펌을 창립한 대표변호사의 대외업무를 지원하는 부서였다. 변호사님은 해외출장을 다녀오시고 나면 매번 여러 개의 명함을 가져오셨다. 주로 미국에 있는 주요 로펌의 변호사들이었다. 보통 명함 뒷면에는 변호사님의 필기체가 메모가 적혀있었다. 인상착의든, 특이한 대화 내용이든 만난 사람을 기억하는 대표 변호사님의 방식이었다. 명함을 받으면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명함집에 끼워두고 역시 알파벳 순서로 정리된 해외 로펌들의 리스트에 변호사님의 최근 만남을 업데이트했다. 그 리스트만 봐도 변호사님이 어떤 로펌의 어느 변호사를 자주 방문하시는지 파악이 가능했다. 70년대 로펌이 창립된 이래 같은 방식이 전수되고 있었으니 우리 팀이 관리하고 있던 로펌 리스트는 그야말로 방대했다. 대표 변호사님은 출장에서 돌아오시면 출장 중에 만났던 인사들에게 어김없이 감사 편지를 보내셨다.
내가 맡았던 일중에 주요 업무가 바로 대표변호사님 이름으로 나가는 영문 레터 작성이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작문스킬을 요하는 일이었으니 한때 소설가를 꿈꾼 문학도로서는 어느 정도 재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인사에게 편지를 써야 하면 명함 뒤에 변호사님이 남겨둔 메모도 보고, 이번에 처음 만난 사람인지 과거에도 만난 이력이 있는지 찾아본다. 만난 이력이 있는 사람이면 전에 주고받은 편지도 참조해 맥락을 이해한다. 그리고 전임자들이 상황별로 정리해둔 템플릿을 참조해가면서 초안을 완성한다. 그러고 나면 부장님은 내가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시고 변호사님의 결재를 받으러 가신다. 어떤 날은 (내가 알턱이 없는 개인적인 내용) 한 두 줄 첨언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수정 없이 초안 그대로 채택이 되기도 했다. 초안이 컨펌되면 이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격식을 차릴 때는 회사 로고가 박힌 고급 편지지에 타이핑을 해서 국제우편으로 보냈다. 물론 이메일 포함한 모든 편지는 보내기 전에 복사본을 남겨 파일링 한다.
우리 팀의 다른 구성원들은 변호사님의 일정을 주로 관리했다. 특이하게도 우리 팀에서는 K항공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몇 명 있었다. 변호사님이 K항공사의 고문변호사였기 때문에 인력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들었다. 그중에서도 두 명의 여직원들이 번갈아가며 변호사님의 개인 비서 역할을 맡았다.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내 인생의 큰 변화로 이어진 작은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 H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H과장님을 나는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는 부드러운 표정과 차분한 음성에 온화한 성격이 배어 나오는 사람이었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항공사 직원에 따뜻한 성품부터 세련된 매너까지 나 같은 사회초년생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선배였다.
다 같이 축구경기를 보러 맥주집을 향하는 길에 언니는 대뜸 나에게 물었다.
“J는 뭘 하고 싶어?”
“네?!”
망치로 한대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이라는 게 뭔지 나를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이해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언니는 말을 이어갔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차근차근 준비해보는 건 어때?”
‘언니는 알고 있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따로 있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취업이란 걸 했을 때 모두들 축하해줬다. 연봉이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업무강도가 세지 않고 칼퇴근이 보장되고 수십 년 동안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은 안정적인 직장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입사한 지 아직 1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뭘 하고 싶어?”라고 묻는 사람이 없는 시기였다. H언니를 많이 좋아하고 잘 따랐지만 커리어에 대한 조언을 구한 적도 없었다. (다시 언니와 연락이 닿게 된다면 묻고 싶다. 그날 언니가 그런 질문을 던진 이유가 있었는지.) 언니의 질문은 나를 싸고 있던 자기기만을 깨는 송곳이 되었다.
겉으로는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 고마운 첫 직장이었다. 라디오 PD 시험에서 떨어지고 발등에 떨어진 취업을 준비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세상 물정 모르는 문학도였다는 것을. 학점도 좋은 편이고 영어 공인점수도 높아서 취업은 문제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기업은 서류 통과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문학 전공자가 지원할 수 있는 직군 자체가 드물었다. 라디오 PD에 다시 지원할 계획이라 일단 부모님에게 손을 빌리지 않을 돈벌이가 되는 직장을 찾자고 마음먹었다. 몇몇 중견 기업의 비서 자리 면접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운 좋게 이 로펌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대형 로펌에다 체질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한 비서 포지션도 아닌 국제부 직원 자리였다. 어쨌든 내 손으로 처음 월급이라는 것을 받은 곳이었다. 회사 분위기는 상당히 딱딱했다. 다들 점잖아 보였지만 변호사들과 일반직원들 간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뚜렷한 곳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닐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으나마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왔고 호탕하고 성격 좋은 M선배와 근처 백화점으로 쇼핑 다니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라디오 PD 시험을 다시 봐야겠다는 다짐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계속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출근 첫 주에 알아차렸다. H언니가 “J는 뭘 하고 싶어?”라고 묻기 전까지 나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직장은 어떤 곳인가? 안정성이나 급여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더 배우고 성장하고 싶은 열의가 생기는 곳인가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첫 직장은 성장 기회는 거의 없다 싶은 곳이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다른 일을 찾아야 했다.
그렇다면 한 번밖에 시도하지 않은 라디오 PD에 다시 도전해야 할까? 그때만 해도 ‘기레기’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이었고 언론사 입사는 많은 대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경쟁률이 무시무시해서 ‘언론고시’라고들 불렀다. PD, 기자, 아나운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스터디그룹을 짜서 매주 스터디를 했다. 다른 직군도 물론 경쟁률이 높았지만 라디오 PD는 가장 많을 때가 방송 3사에서 한 자리씩 총 세 자리, 어떤 때는 채용 공고가 아예 안 뜨는 해도 있었다. 엄밀히 따져보니 그 일이 아니면 절대 안 되겠다 싶은 일은 아니었다. 라디오 PD를 꿈꿨던 건 라디오를 청취자로서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을 한다고 해서 라디오를 즐기지 않을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과감히 라디오 PD 꿈을 접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회사를 무작정 그만두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그간 부모님에게 학비며 생활비를 받아오며 살았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영어였다. 근무 중에 다른 책을 펼쳐볼 수는 없었지만 무엇이든 영어로 된 교재는 업무의 연장으로 용인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현실적인 점검을 거쳐 통역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다. 학창 시절 내내 영어를 좋아하고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지만 영어를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통역사?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학원에서 영어를 처음 접하고 대학 4학년 때 어학연수하러 캐나다에서 5개월 2주 보낸 게 전부인 내가?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결정 중에 하나였다.
2003년 연초에 역삼역 근처에 있던 통대 준비학원을 끊었다. 수도승 같은 삶으로도 유명했던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바로 실전 투입이었다. CNN 같은 영어뉴스를 듣고 선생님이 무작위로 호명하면 앞으로 나가서 바로 통역하고 선생님의 피드백을 받았다. 일주일에 세 번 퇴근 후 을지로입구에서 역삼역으로 학원에 갔고 학원이 없는 날은 집 근처 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다. 잠들기 전까지 영어 뉴스를 반복해서 듣고 스크립트를 달달 외웠다.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단어들이 생기고 배경지식이 늘어나는 게 재밌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과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리 통역 실력도 함께 향상됐다.
드디어 시험이 다가왔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이상하게도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시험도 경험이니 한번 연습했다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일 년의 준비시간이 흐르고 두 번째 시험이 다가왔다. 시험 한 달 전 무렵부터 무서운 집중력에 나 스스로조차 놀라게 되었다. 그간 닦아놓은 실력 근육도 꽤 단단해져 있었다. 드디어 시험 날이 밝아왔다.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안되면 통역대학원은 내 능력 밖이라고 인정하고 깨끗이 단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겨울 드디어 합격 통지를 받았다. 대학 합격 때보다 더 기뻤다. 며칠 후 대학원에서 전화가 왔다. 입학시험 점수 상위 10% 성적 우수자로 1년 전액 장학금 수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수혜기간을 줄여 더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으로 학교 정책이 바뀌었다고 들었다.) 합격은 몰라도 성적 우수까지? 기쁨을 넘어 실감이 나지 않아 얼떨떨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대학원 학비가 부담되었는데 가뭄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그렇게 1년은 장학금으로 나머지는 첫 직장에서 저축해놓은 돈으로 학비는 해결되었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다니던 회사에 퇴직서를 냈다. 그간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게 해 준 첫 직장과는 그렇게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