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워지기 위해서는 부자연스러운 노력이 든다.

To become effortless

by 루이보스J

To become effortless takes tremendous efforts.


눈은 앞, 옆, 뒤를 주시하고 손은 핸들에 동시에 발은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를 넘나들며 1500킬로 무게의 장비를 몬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운전이다. 지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일련의 행동들이 처음에는 얼마나 부자연스러웠는지 떠올려보자. 손도 발도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데 눈은 계속 주변을 주시해야 한다. 이 부자연스러운 일련의 동작들이 숙련되면 운전면허증을 받는다. 처음 운전 연수받았던 날, 핸들 잡은 내 손에서는 수도꼭지처럼 땀이 멈추지 않았다. 그 전에는 내 손에서 그렇게 많은 땀이 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운전하다가 연신 바지에 땀을 닦아야만 했다. 운전 연수를 마치고서도 한동안 손에서 땀이 멈추지 않았다. 차차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손의 땀도, 심장이 쿵쾅 거리던 것도 멈추었다. 모든 신경이 곤두서서 좋아하는 라디오도 틀 엄두가 안 났는데 어느 순간부터 음악을 틀어놓고 운전을 즐기는 나를 발견했다. 이제 더 이상 머리로 조작하지 않는다. 운전은 그 사이 몸이 기억하는 활동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마치 인적이 없던 숲에 처음 길을 내는 작업과도 같다. 빽빽한 나무 사이로 길을 내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지만 한번 길이 만들어지고 계속 그 길을 쓴다면 통행이 수월해진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 그 길을 다니지 않게 되면 길의 흔적은 사라지고 다시 무성한 나무숲으로 바뀌고 만다.


A라는 언어를 듣고 이해해서 바로 B라는 언어로 바꾸어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보통은 무슨 언어든 발화된 언어를 듣고 이해하면 그만이다.


발화 -> 이해


하지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쓰는 언어가 다르다면 부자연스러운 과정이 하나 더 추가될 수밖에 없다.


발화->(의미 전달)->이해


전달자는 양쪽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이해는 언어뿐 아니라 배경 지식, 맥락까지 포함한다. 배경 지식과 맥락 이해는 통역의 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배경지식이 없는 채로 희귀병 치료제를 주제로 하는 제약업계 학회에 갔다고 쳐보자. 우리말로 진행되는 학회라 해도 의사나 제약업계 전문가들이 말하는 내용이 외계어처럼 들릴 게 뻔하다. 또 갑자기 인수합병을 논의하는 회의에 투입되었다고 생각해보자. 어느 쪽이 인수하는 회사이고, 어느 쪽이 피인수되는 회사인지 사업 다각화 측면으로 이루어지는 인수합병인지, 인재 확보가 목적인 인수합병인지 그 배경은 무엇인지 사전에 숙지하지 않으면 십중팔구 곤욕을 치르게 된다. 내용 이해에만 쏟아도 모자랄 에너지의 상당 부분은 상황 파악에 할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의가 끝날 때까지 통역사는 잠시도 다른 곳에 주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어려운 내용이 아닌 일상 대화라 하더라도 잠깐 다른 곳에 주의를 뺏기면 그 부분의 의미는 놓치게 되지 않나. 하물며 내용이 어려워서 통역사까지 부른 세팅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부자연스러운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까지는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통역사를 양성하기 위한 일련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 통역대학원이다. 합격의 기쁨은 잠시고 통대 생활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수업 때마다 실전처럼 통역을 하고 교수님과 급우들에게 평가를 받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통역사는 체질이 아닌 것 같으니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낫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상해서 눈물 바람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리프레이징(Rephrasing)

통역대학원 들어간다고 해서 바로 통역을 배우는 것은 아니다. A->B, B->A 전환으로 들어가기 전에 A->A’ or B->B’ 부터 배운다. 우리말로 들은 내용을 소화해서 내 언어로 다시 표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어로 들은 내용을 소화하여 다른 언어로 전환하지 않고 그대로 영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1) 원문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2) 이해한 내용을 의미나 뉘앙스의 손실이 없이 내 말로 잘 표현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훈련이다.



노트 테이킹(Note-taking) & 심벌 (Symbol)

A언어를 잘 소화하지 못한 다면 B언어로의 전환으로 넘어갈 수 없다. 또한 이 단계에서 통역에서 가장 중요한 스킬 중에 하나인 ‘노트 테이킹’을 배우게 된다. 통역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통역사들이 연사의 말을 열심히 노트하고 그 노트를 기반으로 통역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노트 테이킹’은 수업내용을 정리하는 노트와는 성격이 다르다. 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차의 경우), 또는 동시에 다른 방향 언어로 재현해야 하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받아 적을 여유가 없다. 정자체로 쓸 여유가 없다고 해도 내가 노트한 걸 내가 알아보지 못하면 큰일이 난다. 급할 때 심하게 글씨를 휘갈겨 쓰는 편인 나도 내 노트를 못 알아봐서 고생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급해도 알아보게는 써야 한다. 통역사들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심벌을 사용한다. 네모(국가), 세모(변화) 등 통역사라면 거의 다 쓰는 공통적인 심벌도 있고 통역하면서 스스로에게 편한 심벌들을 개발해서 나만의 심벌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노트 테이킹은 각자의 노하우의 집합체로 그 모습이 천차만별이다. 어떤 모습이든 이해한 내용을 재빠르게 떠올리게 해주는 구조가 잘 짜인 노트가 최고의 노트다. 어떤 통역사의 노트는 언제 저걸 다 적었나 싶게 빽빽한가 하면, 한 단어 씩만 적거나 접속사 위주로만 노트가 되어있어서 저것만 보고 어떻게 내용을 살려낼까 싶은 초현실주의 같은 노트도 있다. 우리를 가르쳤던 교수님 중에 어떤 분은 기억력이 너무나 좋아서 점, 쉼표 정도로만 이루어진 노트로도 훌륭한 통역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되기도 했다.


A->A’, B->B’가 편해지면 본격적으로 통역을 배우게 된다.


공부 자료는 신문기사, 연설문, 책이나 논문 등의 발췌문 등으로 다양하다. 주제를 한정하지 않으면 영역이 너무 방대함으로 주 단위로 통상-정치외교-경제-사회-노동-환경 등으로 공통 주제가 정해진다. 매주 정해진 주제를 공부하고 주제에 맞는 자료를 골라한->영, 영->한 통역을 연습하는 과정이다.


A-> B


A에는 1) 전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핵심, 2) 핵심을 뒷받침하는 부연 내용 3) 기타 예시 등이 나열되어있을 수 있다. B언어로 1), 2), 3)을 의미나 뉘앙스 손실 없이 적확한 표현으로 적당한 시간 내에 재현해낸다면 성공이다. 여기서 ‘적당한’ 시간이란 연사가 말한 시간이랑 비슷하거나 연사가 말한 시간보다 약간 더 빨리 전달하는 것이다. (동시통역은 당연히 동시에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연사가 3분 동안 이야기한 내용을 4분이나 5분 걸려서 통역한다면 ‘늘어진’ 통역이다. 보통 현장에서는 연사의 말보다는 조금 더 빠른 통역을 선호한다. 회의 진행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1분만 늘어져도 회의 참석 인원이 10명이라면 10분을 낭비한 셈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 연사의 말의 끝남과 동시에 통역을 바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연사의 말이 끝났는데도 노트를 이어가고 통역할 때까지 뜸을 들이는 습관은 금물이다.


A->B에 다다르기까지 여러 가지 난관을 거쳐야 한다.


A로 발회된 내용 이해-> 잘 구조화된 노트 테이킹-> 노트 해독->가장 적합한 도착어 어휘로 재현


이 중에 한 단계라도 삐끗하게 되면 결과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딜리버리(Delivery)/아웃풋 컨트롤 (Output Control)


아무리 좋은 내용물이 들어있다고 해도 포장 상태가 허술하면 가치가 떨어져 보인다. 통역도 마찬가지다. 의미 손실 없이 가장 적합한 어휘로 뉘앙스까지 살렸지만 마지막 포장 단계에서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면 평가가 떨어질 수 있다.


가령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전달력이 떨어지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목소리가 크거나, 또는 거슬릴 정도로 목소리 톤이 높은 경우가 그렇다. 말할 때 이상한 습관이 있어서 손동작이 과장되거나 말 중간에 ‘어, 음..’등 ‘필러’가 많이 들어가는 것도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게 하는 요소다. 신뢰감을 주는 앵커들을 보면 하나 같이 중저음의 목소리에 단어 하나하나 발음이 좋다. 통역사에게도 필요한 자질이다. 걔 중에는 다 커서도 어린아이 같은 말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는데 프로페셔널하게 보이고 싶다면 고쳐야 할 습관이다.


동시통역의 과정은 순차 통역보다 더 부자연스러운 작업이다. 특히 한국어와 영어처럼 어순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 훨씬 복잡해진다.


영어는 주어 다음에 바로 동사가 나오지만 우리말은 동사가 맨 끝에 온다. 영어-> 한국어로 동시를 할 때는 동사를 기억해뒀다가 문장 끝에서 한국어로 처리해야 한다. 반대로 한국-> 영어로 동시를 할 때는 한국어의 동사까지 기다렸다가 영어로 처리하면서 연사를 0.5 문장씩 정도 바짝 뒤쫓아 가거나 우리말에서 주어와 동사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 때는 맥락상 동사를 예측하면서 처리할 수도 있다.


가지치기

동시에서는 가지치기가 필수다. 연사는 쉬지 않고 발화하고 있기 때문에 통역사도 중단해서는 안된다. 연사의 말이 빠르거나 주제 상 내용이 빽빽하다면 물리적으로 100퍼센트 내용을 전달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는 과감하게 잔가지를 치면서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핵심의 고삐를 놓치지 않으면서 빠져도 내용 전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요소들을 거의 본능적으로 가려내며 연사의 의중을 전달한다.


숫자 거꾸로 세기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수다. 그 첫 단계는 숫자 거꾸로 세기였다. 통역 부스 밖에서 교수님은 1에서 100까지 세고 부스 안에 있는 학생들은 헤드폰으로 그 소리를 들으며 입 밖으로 100에서 1까지 반대로 세는 것이다. 마치 뇌를 절반으로 나눠서 ‘듣고 이해하는 뇌’와 ‘이해하고 도착어로 재현하는 뇌’를 분리하는 하는 연습이다. 어떤 친구들은 이 ‘분리’ 작업이 빨리 돼서 금방 발군의 실력을 보이기도 했고 어떤 친구들은 이 ‘분리’ 작업이 오래 걸려서 동시 수업 때마다 ‘동시가 정말 가능한 게 맞나?’라고 토로하며 힘들어했다. 이렇게 부자연스러운 일도 오랜 시간 집중해서 연습하면 자연스럽게 되는 날이 온다. 동시에 연사의 말을 옮기고 청중들이 바로 반응하면서 콘퍼런스든 회의든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보면 그 만족감이 얼마나 큰 지 모른다.


고삐 놓치지 않기

순차든 동시든 나는 늘 경주마 위에 오늘 기수를 떠올린다. 아무리 내용이 어려워지고 복잡해져도 가장 중요한 핵심, 고삐는 놓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린다. 최악의 경우 너무 어려워서 상당 부분 내용을 놓쳤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고삐를 놓치지 않고 빠져서는 안 되는 알맹이를 붙잡고 전달한다면 적어도 회의를 망치지는 않는다. 책임감 있는 통역사라면 그 어떤 악조건에서도 ‘고삐’를 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예술의 영역이든 생활의 달인 주인공이든 남이 보기에 쉬워 보이는 거의 모든 일들은 부단한 부자연스러운 훈련의 결과일 때가 많다. 일단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은 질문은 의외로 쉬워질 수 있다.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심지어 즐길 수 있는 부자연스러운 훈련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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