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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Jan 05. 2024

기품있는 결단

<영화 리뷰> 리빙(Living): 어떤 인생

예전부터 비행기 타는 걸 좋아했다.


아이가 생기고 난 이후 오롯이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 이후부터는

비행기 타임이 절. 실. 해졌다.  


몇 시간씩 통째로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으로는 거의 유일하니까.

(어디에도 갈 수 없었던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공항 리무진마저 그리웠다)


 모두들 잠든 깜깜한 기내에서 영화나 책을 보거나 머릿속 상념등을 끄적일 때의 달콤한 한가로움이란...!


이번 연말에도 비행기에서 보석 같은 영화 몇 편을 봤다.


그중 하나가 오늘 소개할 영화 <리빙: 어떤 인생>


하루도 빼지 않고 같은 시간에 집과 직장을 오가는  윌리엄스(빌 나이).

그는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한 정년이 보장되는 런던 시청 공무원이다.  

 ‘안정된 직장’의 다른 이름은 ‘참을 수 없는 무료함의 연속‘일까?

성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윌리엄스는 사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관료의 삶을 이어 어고 있다.


 오죽하면 "Mr. 좀비"가 별명이 되었을까.

그런 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온다.  

남은 인생이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기회말이다.

암에 걸려 죽음이 얼마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

그는 어쩌면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윌리엄스는 '이제라도 인생을 즐겨보겠노라' 결심하고 난생처음 무단 결근한다.  

 전 재산의 절반을 인출해 돈다발을 듣고 무작정 바닷가 휴양지에 가서 흥건하게 술에 취해본다.  

  좀비 세계에서 유달리 생기 넘치는 막내 공무원 마거릿(에이미로 우드)과 우연히 마주친 김에  

평소에는 엄두도 못 낼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기분도 내보고 함께 극장에도 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처음 만끽해 본 자유로움과 일탈로는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조금도 옅어지지 않는다.  


윌리엄스는 드디어 결단을 내린다.

기품 있는 결단


죽음이 다가와도 오늘의 본분에 충실할 것.


번개라도 맞은 듯  윌리엄스는 즉시 행동에 나선다.


그리고 갑자기 윌리엄스의 장례식 장면으로 화면이 바뀐다.

문상객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석해하며 흐느끼고

시청 동료들은 그가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를 회고한다.  


그렇다.  

죽음이라는 절실함은 윌리엄스가 일하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그간 골치 아픈 민원은 관성적으로 다른 부서로 넘기거나 서류철에 넣어두고 미뤄두기만 했던 윌리엄스는

자신의 일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결기로 어떤 일에 착수하고 온갖 난관을 극복해 내고 완수해 낸다.

(어쩌면 거창할 것 없는 선택이 윌리엄스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게 하는지 직접 확인하시길!)


그가 밀어붙이는 일이 부당하게 좌절되는 순간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그를 보고 동료가 묻는다.


왜 이렇게 침착하세요?


"화낼 시간이 없거든요."
I don’t have time to get angry.


화낼 시간이 없는 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윌리엄스 일뿐일까?  

언제일지 모를 뿐 우리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이를 깨닫는 순간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화낼 시간이 없다.

내가 꼽은 명장면: 눈이 오늘 겨울밤 어릴 적 불렀던 노래를 흥얼거리는 윌리엄스


빌 나이의 담백하면서도 빼어난 연기,

이를 가능케 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담담한 각본,

 1950년대 런던의 클래식한 풍경을 근사하게 재현하고

잔잔하지만 커다란 감동을 자아내는 연출까지

흠잡을 데 없는 영화 <리빙:어떤 인생>



표지사진: UnsplashJill He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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