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전조
1924년 12월 27일 100년 전 오늘 아버지께서 태어나신 날입니다. 9남매 막내로 태어났을 때 큰 형님을 필두로 여섯 분의 형님과 두 분의 누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기울어 가는 집안을 일으킬 여력도 없이 애처로이 늙어가는 종이호랑이처럼 소멸해 가셨다 합니다. 나라를 잃고 꼭 스물세 번의 겨울을 나신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책만 보는 퇴락한 서생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아홉 살 인생 최대 위기는 그렇게 찾아옵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을 살피던 아버지의 제일 큰 형님이 징병으로 강제 입대 후 전사했다는 전보가 옵니다. 그 소식에 곱디고운 할머니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고, 아버지는 암울하기 그지없는 집안 분위기에 한없이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누구의 죄로 인해 이렇듯 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인지 우문을 품어도 누구라도 답해 주는 이가 없다. 아마도 하늘에 계신 높은 저분은 귀머거리가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 선 이리도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나의 기도는 단순하다. 제발 이 나라를 우리의 허락 없이 차지한 그들의 무례함을 벌하여 주시고, 그 벌을 받은 이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데까지는 10년 하고도 2년이 더 걸렸다. 내가 기도한 것도 까마득히 잃어버린 채 넋을 잃고 멍한 눈으로 맞이하게 되니 말이다.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 형님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날은 왔으나, 힘없는 나의 조국은 자신의 권리마저 이름만 다를 뿐 전보다 더 힘이 센 녀석에게 똑같이 빼앗길 듯하다. 게다가 그런 녀석이 두 놈이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나라 지키는 군인이 되기로 했다. 위로 형님들은 가정을 이루어 그나마 삶의 평온을 찾았고, 두 누님 역시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었다. 해방되기 일 년 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나는 끈 떨어진 신발 꼴이 되어 그 어디에서 운신할 곳이 없으니 명분 있는 선택은 직업 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후 나에게 닥칠 태풍 같은 폭풍은 감지하지 못한 채 해방되던 해는 그렇게 서산으로 지고 말았다.
신탁이니 반탁이니 시끄럽던 세상이 잠잠해지고 또다시 힘센 녀석의 보호 아래 우리는 각자의 삶을 힘겹게 살아간다. 미 군정의 입김이 세니 어느새 그쪽으로 줄을 서기 위해 동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지만, 나는 그런 줄도 없고 의지도 없으니 군에 속해 있어도 여전히 혼자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나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와 추운 겨울에 입으라고 솜을 넣어 만든 옷을 넣어 주시는 셋째 형수만이 유일한 줄이 되었다.
미 군정이 들어선 가운데 통일 조국을 세워야 한다는 열망 아래 세상이 또다시 시끄럽다. 소련군이 있는 북쪽은 맨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지만, 이젠 자유로이 갈 수가 없다. 내가 속한 부대는 황해도 옹진군 옹진반도 개머리 해안 부근에 있다. 넷째 형님이 광산 일로 이곳에 오시게 되어 함께 지내면 좋을듯하여 지원해서 오게 되었다. 38선이 그어지고, 남한 땅 서쪽 끝에 자리한 옹진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연평도를 마주하고 있는 꼴이어서 섬 같은 곳이다. 옹진군의 대부분이 남한 땅이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전쟁이 난다면 아군의 지원은 받을 수도 없는 고립무원이 될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살고 있는 사람이 꽤 많은 이유도 일제가 개발하다 버리고 간 광산에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넷째 형님도 그 이유로 처자식과 떨어져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요 며칠 북쪽 애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자꾸 철책선을 넘어 도발을 한다. 그런 놈들을 당장 본때를 보여줘 혼내주고 싶은데 상부의 지시로 그럴 수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그제 저녁에는 보름달이 떠 대낮같이 훤한 밤이었는데도 우리가 애써 빨아 널어 놓은 옷가지를 훔쳐 가는 대범함도 보였다. 마치 먼저 주먹이라도 날려보란 듯이 마구 충동질을 해 어린 후임들을 단속하는 데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