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다니는 이 회사는, 매출액으로 보나 임직원 수로 보나 작은 회사는 아니다. 회사가 업을 영위해온 지도 꽤 오래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것도 안되고 있나 싶은 것들이 많다. 한두 가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많다. 회사라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에서 어떻게든 굴러가는 것일까. 아니면 이 회사가 유독 심한 것일까.
S 팀장 : T야.
T 과장 : 네 팀장님.
S 팀장 : 이번에 문제 터진 고객사 있지? 걔네 계약서 좀 가져와봐.
T 과장 : 알겠습니다. C 대리에게 요청해놨습니다.
S 팀장 : 뭐 이렇게 오래 걸려? C야!
C 대리 : 네 팀장님
S 팀장 : 문제된 고객사 계약서 어디 있어?
C 대리 : 아 지금 찾고 있는데, 오래된 계약서라 파일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찾고 있습니다. 곧 전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 팀장 : 아니, 스캔 파일이라도 먼저 줘
C 대리 : 따로 스캔해놓지 않아서요
S 팀장 : 정리가 안되어 있어? 지금 그럼 캐비넷을 일일이 까고 있다고?
C 대리 : 네..
S 팀장 : 아니, 그거 정리 한번 해야하는 거 아냐?
C 대리 : 네, 계속 정리해야 한다고 건의드렸었는데. 아직 진행이 되질 않았습니다.
S 팀장 : 이번 꺼 해결되면, 다른 것보다 계약서 정리부터 우선으로 처리해. 아직까지 정리가 안됬다는 게 말이 되나
C 대리 : 네 알겠습니다. 저희 인력이 필요해서요. 혹시 얼굴 사원도 같이 진행해도 될까요
S 팀장 : 그래
얼마 뒤, C 대리가 회의실로 그를 부른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A 사원도 함께 있다. A 사원은 C 대리의 후임으로, 얼마 전 입사한 경력직이다.
C 대리 : 아 얼굴아, 이쪽으로 앉아. 많이 바쁘지?
그 : (전표만 친다) 아닙니다!
C 대리 : A 사원이랑은 서로 알고 있지?
A사원/그 : 네!
C 대리 : 오늘 부른 이유는, 얼마 전 S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계약서 정리를 진행하기 위해서야. 예전부터 했어야 하는 건데. 이제서야 진행을 하네. 지금은 매출계약서를 영업 측에서 계약 체결하고, 전달해주면 그냥 우리가 캐비넷에 보관만 하고 있거든. 그런데 영업에서도 일을 하다보면, 예전 계약서를 참고할 일이 생겨. 지금은 어떻게 보여주고 있지?
A 사원 : 요청오면 제가 전달하고, 급하다고 하면 워드 파일로 주고 있습니다.
C 대리 : 워드 파일로 주는 것도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는 게 아냐. 실제로 날인이 완료된 버전을 줘야지. 날인 버전이 워드 파일이랑 내용이 달라졌으면 어떡해? 그 계약서 조항이 크리티컬한 조항이면, 결국 회사가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거야.
그는 대화를 들으며, C 대리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C 대리는 영업에서부터 시작해서 현재 영업 쪽 기획을 맡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업과 관련된 내용도 빠삭하게 알고 있는 눈치다.
C 대리 : 지금 A랑 내가 스터디를 해서, 계약서 정리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있거든. 아예 영업에서 계약서 주면, 바로 스캔해서 공유 파일로 자동으로 스캔 파일이 올라가게끔. 얼굴이도 스터디 해봐. 사업지원팀에서 어떻게 업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주로 엑셀 쓰나? 나는 우리가 스터디하는 게 사업지원팀에서 오히려 더 자 활용될 거라고 생각해. 함수 한 번 짜놓으면, 스캔본 자동 업로드 같은 것도 활용할 수 있거든.
그 : 오...
C 대리 : 스캔, 계약서 관리는 A가 맡아서 할 거야. 얼굴이를 부른 건, 처음 계약서 스캔하면서 수기로 기입해야할 내용들이 있거든. 여기 보면 서비스명, 계약 기간 이런 거만 기재해주면 돼. 기입할 건 많지 않은데, 우리가 계약서가 좀 많아. 얼마나 되지? 1,000개 되나?
A 사원 : 네 그 정도 됩니다. 지금 약 200개 진행했습니다.
C 대리 : 그래. 얼굴이도 A 사원한테 어떻게 하는지 듣고, 나머지 계약서들 정보 기입하는 거 좀 도와줘. 아마 다음주까지는 계속 이것만 해야되지 않을까 해.
그 : 알겠습니다!
C 대리는 자리로 돌아가고, 그와 A 사원만 남는다. A 사원은 계약서 정리 작업을 위해, 사무실 내 별도의 방 하나를 아예 작업실로 만들어 쓰고 있다. 이 회사는 사무 공간의 창문을 전부 블라인드로 막아놓았는데, 이 별도의 방은 별개다. 회색 구름이 낀 우중충한 하늘이긴 하지만, 블라인드에 막힌 창문만 보던 그는 속이 뚫린 듯 후련하다. 사업지원팀 파티션에 비해 너무 쾌적하다. 상사들의 눈에서 벗어난 것 때문인가.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 A 사원님 안녕하세요. 어떤 걸 도와드리면 되나요?
A 사원 : 아 네. 저쪽은 작업 다 된 것들 모아놓은 거고, 이쪽에 있는 계약서들은 이제 작업 진행해야 될 것들이에요. 계약서 보시고서, 서비스명이랑 계약기간을 여기 시트에다가 기입해주세요. 시트 초대드렸어요.
그 : 네 감사합니다.
A 사원 : 구분이 좀 애매한 것들은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그 : 네!
계약서 정리 작업에 합류한 시점부터, 그는 이 별도의 회의실에서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보낸다. 오전에 출근하여 급한 전염병 전표만 후딱 처리하고는, 노트북을 들고 얼른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다. 바깥 풍경을 보며 실컷 물을 마시고, 계약서를 하나하나 넘겨가며 서비스 이름과 계약 기간만 시트에 기입해 넣는다. 일 자체의 난이도가 상당히 낮지만, 계약서가 너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업무를 시작하면 A 사원이 회의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상사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여유를 느끼는 그다.
약 일주일 동안 업무를 진행하며, A 사원과도 약간의 친분이 쌓인다. A 사원의 나이는 그와 또래였지만, 이전 직장 경험이 많은 경력직이다. 대리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할까. 처음 C 대리와 함께 있는 회의 자리에서의 A 사원은 상당히 딱딱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A 사원과 둘이서만 있다 보니, A 사원이 확실히 그보다 사회생활 노하우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 그다.
그 : A 사원님, 지금 있는 거는 다 끝났어요. 또 있나요?
A 사원 : 잠시만요. 더 하려면 캐비넷에서 가져와야 해요.
그 : (열정적으로) 어느 캐비넷에 있나요? 제가 가져올게요.
A 사원 : 아뇨 얼굴님. 잠깐 쉬어요.
그 : ??
A 사원 : 좀 쉬기도 하고. 속도 조절해가면서 하자는 거죠.
한 박자 늦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