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차장 : 얼굴아
그 : 네!
V 차장 : 오늘 새로 들어오는 신규 입사자 명단이야. 모니터랑 키보드마우스 같은 집기들 불출해주고.
그 : 네네.
V 차장 : 그리고 여기 노트북이랑 PC들인데. 아마 OS가 안 깔려 있을거야.
그 : (?) 네
V 차장 : USB에 운영체제 다운로드 한 다음에, USB로 부팅하면 설치되거든. 세팅한 다음에 불출해줘.
그 : (이해를 못 했다) 알겠습니다.
V 차장 : 이런 거 원래 구매하는 업체에서 다 해가지고 가져다주는 건데... 아무튼 부탁해
이 시기 사업지원팀에서는, 신규 입사자들이 들어왔을 때 비품 불출을 담당했다.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등의 비품은 재고를 그대로 불출하면 되니 어렵지 않다. 문제는 노트북이나 PC다. 컴퓨터 장비에 문외한인 그가 한참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노트북과 PC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운영체제(소프트웨어)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 그가 눈으로 보고 인지하는 노트북과 PC라는 물건은 말 그대로 '하드웨어', 즉 기계 장치일 뿐이다. 이 기계 장치가 구동되고, 모니터에 무언가 조작할 수 있는 화면이 나오게끔 해주는 것이 바로 운영체제라고 한다. 쉬운 말로는 'Window'란다.
즉, 사업지원팀에서 지금 갖고 있는 노트북과 PC는 윈도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신규 입사자들이 받자마자 바로 쓸 수 있게끔, 이 기계 장치들(하드웨어)에 Window 운영체제(소프트웨어)를 설치해주라는 것이다. 컴맹에 가까운 그, 당연히도 그에게는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가 예견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시행착오들을 극복한다 하더라도 그가 컴퓨터의 달인이 될 지 여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업무는, 훗날 임직원들의 입퇴사가 너무 잦아지게 되면서 결국 신규 입사자 스스로가 하게끔 프로세스가 바뀌게 된다. 아무리 '사업지원'팀이라지만, 다른 업무 제껴두고 노트북 세팅만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업무 선상에서 없어지자, 그가 그동안 고생하며 간신히 터득한 노하우의 대다수가 순식간에 휘발된다. 이해의 깊이가 얕았던 것도 원인 중 하나였다)
어쨌든 이때의 그는 미래를 알지 못하며, 당장 맡은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는 V 차장이 귀찮아할 정도로 계속해서 묻고 물으며, 하나하나 단계를 터득한다.
1) USB에 윈도우 운영체제를 다운로드한다 (동시 작업을 위해, 그는 2개를 만든다)
2) 노트북/PC에 모니터와 키보드를 연결하고, USB를 꽂는다
3) 노트북/PC 전원을 키고, 전원이 켜지자마자 키보드로 F11을 연타한다 (F4일 때도 있고, 복잡하다)
4) BIOS 화면으로 진입한다. (그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멋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ㄴ검정색 화면에 하얀 글씨가 가득한, 뭔가 잘못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화면이다.
5) BIOS 메뉴에서, 부팅 순서 중 1순위를 USB로 바꾼다.
6) 세팅을 바꾸면 재부팅된다.
7) 재부팅 시, USB를 통해 부팅이 이뤄진다. 즉, USB에 깔린 윈도우 운영체제를 통해 부팅한다.
8) 모니터에 윈도우 운영체제 설치 진행 화면이 뜬다.
9) 각종 세부 세팅을 하며 윈도우를 설치한다.
맨 처음 운영체제를 설치할 때, 한 대를 처리하는데 약 2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바이오스 화면 접속하는 것을 알아내는 데만 한참 걸렸고, 바이오스에서 설정을 어떻게 바꾸는지 몰라서 껐다가 다시 킨 것도 수 차례다. 그렇게 장애물들을 넘고 넘어, 간신히 노트북에 로그인 화면이 떴을 때 그는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노트북이나 PC들도 기계마다 개성이 있는 것인지, 뭔가 조금씩 다르다. 모델이 같더라도, 설정이나 화면 모양이 어딘가 약간씩 다르다. 아니, 사실 똑같은데 그가 할 때마다 까먹어 다르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는, 운영체제를 설치할 때마다 항상 새롭고 어려웠다. V 차장이나 다른 과장들은 20분도 안되어 뚝딱뚝딱해버리는 것 같았는데, 그는 아무리 시간을 줄여도 최고 기록이 30분이다. 말 그대로 최고 기록일 뿐이며, 평균적으로는 40분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는 자신이 컴맹인 것을 들킬 것만 같아, 운영체제를 설치할 때마다 긴장한다. 긴장할수록 설치는 더 느리게 진행되는 것 같았으며, 그가 당황하는 빈도도 더 잦아졌다.
노트북은 그나마 양반이었으니, PC는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메모리가 얼마나 남았다느니, CPU 버전이 어때서 이 운영체제가 안 깔린다느니 등 외계어가 난무한다. 1시간 넘게 붙잡았지만 진전이 없자, 그는 결국 직원 한 명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영업팀의, 컴퓨터 쪽 전공 직원이다.
그 : 안녕하세요...
영업팀 직원 : 아 네 얼굴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그 : 저 혹시... 컴퓨터 잘 아시나요? 운영체제를 깔아야 하는데 잘 안돼서요...
영업팀 직원 : (자신 있게) 아 그래요? 어떤 문제인가요?
그 : 여기 이 PC인데...
영업팀 직원 : (내부를 보더니) 아 이게 모델이, 잠시만요.
모델을 인터넷에 검색한다.
영업팀 직원 : 아 이 모델이 오래된 거라 호환이 안되서 그런 것 같네요.
그 :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영업팀 직원 : 이 모델 말고 다른 모델 메모리에 설치를 하거나. 근데 다른 게 같이 있네요.
그 : ???
영업팀 직원 : 여기다가 설치하면 되겠네요. USB 갖고 계신가요?
그 : 아, 여기요.
영업팀 직원 : (척척 설치한다)
영업팀 직원의 손길에, 운영체제 설치가 일사천리로 끝난다. 그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것저것 물었고 영업팀 직원도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영업팀 직원이 해준 설명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 (허탈하게) 어떻게 이렇게 컴퓨터를 잘 아세요?
영업팀 직원 : 아 저는 학생 때부터 컴퓨터를 좋아했어서. 혼자서 좀 분해도 많이 하고 했었어요
그 : 오...
그는 대학생 때도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PC 분해와 조립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랬던 그가, 사업지원팀에 입사하여 운영체제 설치 업무를 맡고 있다. 알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그의 사고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든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업무가, 컴퓨터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업무인가. 그게 아니라, 그저 피상적으로 처리하게끔 하는 업무인가. 깊이 배울 수는 없고, 겉핥기식으로만 처리하다가 끝나는 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잘 알지 못하는 그보다는 컴퓨터를 잘 아는 다른 직원이 맡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회사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인가? 컴퓨터를 잘 아는 이공계 출신 직원들은, 부가 가치가 높은 어려운 일들을 맡는 것인가? 고급 지식을 가진 고급 인력들에게는 이런 지원 업무를 시키지 않고, 그와 같은 '사업지원' 인력들에게 이런 일을 할당하는 것이 회사 차원에서 이익이라는 것인가. 또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는 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