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 쇼핑

Clearance Sale

by 하얀 얼굴 학생

외곽에 살다 보니 할 것이 별로 없다. 숙소 내의 사람들은 앉을 공간이 없어서인지 마주칠 기회도 없다. 건설현장 일은 아침 일찍 시작해서 늦어도 5시에는 끝나니, 시간이 남아돈다. 시간이 남아도니 그는 무료하고 심심하다. 브리즈번에서처럼 밋업이라도 참여할까 해서 다시 밋업 어플을 깔아보지만, 대부분의 밋업 모임은 도심에 집중되어 있고 그가 사는 나레 워른같은 외곽에는 아예 모임이 없다.


시간이 많아서 심심한데, 집은 춥고 재미가 없다. 그가 선택한 공간은 쇼핑센터다. 나레 워른은 외곽 지역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다. K-MART와 Coles, Woolworths 등이 모여 있는 쇼핑센터 지점이 있는 곳이다. 그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그는 남는 시간에 도서관에서 일자리를 알아본 뒤, 어김없이 K-MART로 향한다. K-MART 뿐 아니라 다른 식료품점과 유통점들도 모여 있다. 그는 이 '쇼핑센터'에서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그는 원래 쇼핑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호주에서는 특히나 더 즐기지 못했다. 돈을 아껴야 하기 때문이다. 돈을 아끼려는 그에게, 쇼핑센터는 그림의 떡만 가득한 장소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굳이 쇼핑센터를 방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는 시간과 무료함은, 그에게 눈요깃거리를 찾아다니게끔 만들었다. 호주 외곽의 건조하고 담백하면서도 밍밍한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하나 있는 쇼핑센터를 발견한 순간 그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처음에는 그냥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닌다. K-MART는 핸드폰 및 가전, 작업화, 신발 및 의류, 잡화, 간단한 스낵류 등을 취급한다. 다른 것은 너무 비싸고, 스낵을 굳이 K-MART에서 사느니 옆의 식료품점을 가는 것이 낫다. 그가 K-MART에서 구경하는 것은 주로 의류다. 그는 의류와 패션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브리즈번에서 몇 벌의 옷을 버렸고, 브리즈번과 다른 멜버른의 날씨 때문에 긴팔 티셔츠와 긴 바지를 사야 할 필요가 생긴다. 필요하긴 하지만, 성급히 사지 않는다. 그는 어느새 루틴이 된 것처럼, 일이 끝난 후나 이력서를 돌린 후 반드시 K-MART에 들러 의류 코너를 쓱 돌아보고 집으로 간다.



매일 방문해서 보다 보니,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그가 의류 코너를 보다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노란 택이 달린 상품들을 발견한다. 노란 택에는 Clearance Sale이라고 적혀 있고, 원래 가격의 절반 이하로 세일을 하고 있다. 이를 본 순간, 그는 재고 떨이 세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절반이 넘는 할인율에 기쁘지만, 세일한다고 무작정 살 수는 없다. 몇 번이고 방문하면서, 그의 마음에 든 신발과 옷들이 몇몇 있다. 그는 자신이 찜해 둔 옷과 신발이 세일을 하기를 학수고대한다.


매일매일 방문한 것과, 기다린 보람이 있다. Clearance Sale은 신상이 아닌 모든 제품에 해당하는 듯하다. 인기가 많은 제품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Clearance Sale을 한다. 재고가 쌓이는 상품들을 떨어내기 위해, 일정 간격을 두고 돌아가면서 세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찜해 두었던 캔버스 모양 신발, 검정 후드티에 Clearance 택이 붙자마자 구매한다. 둘 다 10불도 안 되는 가격에 구매한다. 10불이면, 8500원 정도다. 신발 하나와 후드티 하나를 합쳐서 17000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처음으로 옷을 사면서 희열을 느끼는 그다.


한 번 재미를 느낀 뒤, 그는 쇼핑의 맛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재고 떨이 세일 택이 붙은 모든 상품들을 눈여겨본다. 그러다가 그의 눈에, 재고 떨이 세일을 하는 한 바지가 보인다. 이 바지는 군복 무늬, 즉 카고 바지다. 그런데 바지가 조금 독특하다. 그가 계속 입어왔던 허리띠를 착용하고 밑단이 그대로 떨어지는 바지가 아니다. 허리 부분에는 벨트를 착용하는 부분이 아예 없고, 끈을 묶어서 고정하는 방식이다. 바지 밑단도 갑자기 발목 부분에서 발목을 조이면서, 한복 바지 같은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품이 커서 널널한 카고 바지다.



그는 이런 바지를 시도해본 적이 없다. 그는 항상 전형적인 청바지, 전형적인 반바지만 입었다. 하지만 눈앞의 카고 바지는 Clearance Sale을 해서 6불이다. 6불이면, 정확히 따지면 5000원 정도의 가격이다. 군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좋지 않지만, 카고 무늬는 사실 꽤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그는 가격에 이끌려, 이 정도면 한번 시도해볼 만하다는 생각에 카고 바지를 구입한다. 군 시절 이후 굳이 사서 입지 않았던 카고 바지를, 호주에 와서 사는 그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 카고 바지를 구입하는 것이, 혁명적일 만큼 새로운 패션의 시도다.



처음에는 그냥 막 입으려고 산 바지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허리끈을 풀었다가 추슬러야 하는 것이 너무 거추장스럽고 귀찮다. 하지만 그냥 입는다. 어차피 6불짜리 바지인데, 이 정도면 몇 번 입기만 해도 본전을 한참 상회할 만큼 뽑아먹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계속해서 입다 보니, 어느덧 이 카고 바지에도 애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냥 막 입으려고 했던 바지가, 결국은 그의 몸과도 같은 바지가 되어버린다. 그는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거의 항상 이 카고 바지를 입는다. 처음에는 그렇게도 거추장스럽고 불편했던 허리끈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벨트보다 더 아날로그적인 매력도 느껴진다. 그는 이 카고 바지를 점점 더 아낀다. 처음에는 싼 가격 때문에 앞뒤 따지지 않고 덥석 집으면서 시작됐지만, 입다 보니 의미가 꽤 크다. 그에게 새로운 패션에 눈을 뜨게 해 준 바지다. 항상 일반적인 청바지만 입던 그에게, 카고 바지는 새로운 시도의 상징 같은 바지다. 그는 훗날 너무 많이 입어서 사타구니에 구멍이 나자, 정성스레 바느질로 꿰맨 뒤 계속해서 이 카고 바지를 입는다. 막 입으려고 했던 바지가, 그에게 동화되다 못해 결국 그의 패션 아이템이 된다. 카고 바지는 그에게 꽤 잘 어울린다.



그는 어렴풋이, 옷차림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그가 정말로 멋있다고 생각했던 옷들은 비싸서 구매하지 않았다. 나중에 사야지, 나중에 사야지 하며 미루고 참는다. 대신 차선으로, 저 멋있는 옷을 사기 전까지 막 입을 옷들을 싸게 구매한다. 하지만 그렇게 싸게 구매한 옷들을 매일같이 입다 보면, 결국 그 옷차림이 그의 정체성이 된다. 아무리 멋있어 보이고 나중을 기약한다고 해도, 실제로 입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그를 정의하는 것은 그가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옷이 아니라, 그가 지금 현재 입고 있는 옷이다. 그리고 현재 입고 있는 옷을 많이 입을수록, 그 옷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간다. 이 점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가 비싸고 멋있어 보이는 옷을 바로 구매하지는 않는다. 그는 카고 바지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카고 바지는 운이 좋았던 사례다. 향후에는, 정말 멋있고 마음에 드는 옷이 있다면 구매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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