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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글을 써볼까

by 하얀 얼굴 학생

취업준비생인 그는, 서류를 난사하고 면접 준비로 밤을 새워가는 와중에도 틈틈이 책을 읽었다. 아니, 어찌 보면 취업 준비보다 책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류 지원과 면접 준비 등의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만족감이 든다. 어쨌든 취업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 왠지 취업에 가까워져 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다. 당연히도, 이런 착각은 탈락 메일 한 번에 무너진다.


독서는, 그에게 취업 준비와는 또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취업준비생인 그에게 독서는 오히려, 해야 할 일이라기보다는 사치에 가까웠다. 독서와 취업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상당히 낮으며, 책을 한 권 끝내고 덮는다고 해서 취업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독서량이 쌓여갈수록 독서가 재밌다. 그의 독서 활동이 마침내 임계점을 돌파하여 독서의 담백한 맛을 깨달은 것인지, 아니면 시험 기간에는 공부만 빼면 무슨 짓을 해도 재밌었던 경험 같은 것인지, 그는 독서가 재밌어졌다. 면접이 없을 때는, 되도록 오전이나 이른 오후까지 서류 지원을 끝내고 독서실로 간다. 면접이 있다면, 면접 직전 며칠 정도만 책을 건드리지 않는다. 면접이 끝나면, 그는 곧장 독서실로 향해 덮어두었던 책을 펼친다.



그가 독서를 시작한 이유는,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발전되었고 지금은 왜 이런 모습인가.

인간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발전되었고 지금은 왜 이런 모습인가.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노트에, 자신이 왜 독서를 하는지 최대한 거창하게 써보았다. 뭐라도 된 것처럼 어깨가 으쓱해졌지만, 결국 그가 독서를 시작한 이유는 아는 것이 없어서다. 유치원, 초, 중, 고, 대학교까지 나왔지만 사실상 그는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불만은 많고, 죽을 만큼 노력해본 적도 없다.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왜 노력을 해야할까. 방향을 잃은 상태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듯 책을 잡았고 다행히도 그가 고른 책들은 그의 시야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그는, 공공도서관의 300번대(사회과학)와 400번대(자연과학) 책들을 주로 읽었다.


우주(세상)

우주는 빅뱅으로 시작되었다 - [시간의 역사 /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우주는 상당히 광활하고 신비롭다 - [코스모스]

우주 중에서도 지구에서는 다양한 생물들과 인간이 생겨났다 - [종의 기원]


인간, 인간이 지구의 지배종이 된 이유

생존에 유리한 돌연변이들이 기나긴 세월을 걸쳐 쌓인 결과다 - [눈먼 시계공]

허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 덕에, 허구의 신화를 믿고 집단으로 협력하기 때문이다 - [사피엔스]

발정기에 상대를 가리지 않는 동물과 달리, 상대를 까다롭게 가리는 번식 경쟁 때문이다 - [연애]


사회

날씨와 지리라는 환경적 요소가, 개별 문명들의 발전 속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총, 균, 쇠]

복제본을 남기려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한 결과다 - [이기적 유전자]

이기적인 동기도, 이타적인 양상으로 발현되곤 한다 - [이타적 유전자]



독서 시작 초기, 그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두꺼운 책들만 골라서 읽었다.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 많았으며, 그는 절반 정도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주 탄생과 진화론 등의 내용을 계속해서 접하다 보니 수박 겉핥기식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알고 싶었던, 세상과 인간이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변화했으며 현재는 무슨 모습인지를 대강 알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윤곽이 그려진 시점부터, 그의 독서 방향이 변화한다.


세상과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알았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다. 그러한 모습의 인간으로서, 그러한 모습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고 싶어졌다. 그는 독서에 철학 분야를 조금 추가한다. 재미있는 책도 있었지만, 철학책은 내용과 문장이 상당히 까다롭고 한 페이지를 넘기기조차 힘든 때가 많았다. 당장의 빠른 정보와 답을 원하는 그는, 철학을 잠시 미루고 위인들의 전기로 선회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살에 대한 조사 - [자살론]

죽음에 대한 조사 - [죽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나 - [정의란 무엇인가]

돈을 추구해야 하나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순간순간에 몰입하며 살아야 한다 - [몰입, Flow]


실제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기업인 자서전 - [이 땅에 태어나서 / 호암자전 / 거래의 기술]

위인 자서전 - [난중일기 / 백범일지]

기타 자서전 - [나, 건축가 안도 다다오 / 골든아워 / 체 게바라 평전]



그는 위인전을 읽기 시작한다. 이전의 두터운 책들에 비한다면, 위인전은 상당히 수월하게 읽혔다. 다만 문제는, 위인전으로부터 그가 습득할 수 있는 정보가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위인전을 읽으면서 그가 느낀 것은, 대단한 줄만 알았던 위인들도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자신감을 얻기도 했지만, 개중에는 위인전을 읽고 기존의 존경심이 반감되는 경우도 있었다.


자서전을 쓴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이 살았던 시기의 자신들의 이야기를 썼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일종의 미래 예측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그와 똑같은 인생을 살았던 위인의 전기가 필요했다. 그는 그런 위인을 찾으려 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초/중/고/대학을 나온 위인. 군대를 다녀올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다가, 제대 후 뭐라도 해보겠다고 외국을 1년 나가본 위인. 외국 생활에서 여러 경험을 하고, 나름 성장하여 돌아온 위인. 돌아온 뒤, 취업의 벽에 부딪혀 1년 이상 허덕인 위인. 이후 모종의 방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한 위인.


어떻게 보면 그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전생, 분신 혹은 도플갱어를 찾는 셈이었다. 그와 똑같은 성격, 똑같은 상황, 똑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았던 그 위인이, 위인으로 이름을 날리기 위해 사용했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싶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것은 없다. 자서전을 쓴 사람들의 성격이 다르고, 태어난 집안도, 살았던 시기도, 겪었던 위기와 극복 과정도 모두 다르다. 그가 찾는, 그에게 너무나도 꼭 맞아서 생각 없이 따라도 되는 편한 정답 같은 것이 책 속에 있을 리가 없다. 이를 깨달은 순간부터, 그는 위인전에 흥미를 잃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는 정답을 찾기 위해 독서를 계속한다. 그가 생각한 것처럼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답은 없을지라도, 대략적인 방향 정도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실제 인물이 아니라면 허구의 인물에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문학으로 독서 범위를 확장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롤모델을, 허구 세상에서 찾아볼 참이다.



정리하자면 그의 독서 경로는 이렇다.


1)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의문

- 사회과학(300번대), 자연과학(400번대) / 오로지 비문학


2) 그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철학(100번대), 위인전기(0~900번대 골고루 포진) / 비문학 + 문학


3) 구체적인 사례(롤모델) 찾기

- 위인전기, 문학(800번대) / 문학 위주



위인전에서 깨달은 것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 주인공들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와 똑같은 주인공은 없다. 그는, 미래에서 그의 인생을 기록해놓은 것 같은 미래로부터의 편지나 예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가 원하는, 입에 떠먹여 주는 정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독서를 계속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방향성도 없었던 자신을, 무지에서 꺼내어 이만큼까지 생각을 진척시킬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독서다. 세상 사람들은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독서는 좋은 행위라고 여긴다. 그는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동안은 비문학 독서에 너무 치중되어 있었으니, 문학을 읽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그렇게 문학 도서를 읽던 어느 날, 그는 어떤 저자의 생각이나 말투가 자신과 닮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현실적인 묘사와 감정적이지 않은 어투로 가치관 펼쳤다. 그는, 그러한 묘사와 어투에 크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저자의 가치관에도 크게 동의한다. 혹시라도 자신의 사고가 더 날카롭게 다듬어지고 훈련되면 이 저자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의 이름은 '조지 오웰'이다.


그가 조지 오웰에게 느낀 일종의 동질감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정점에 이른다. 저자는 위건 부두의 탄광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그리고 파리로 이주했을 당시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접시닦이 등의 일자리를 전전했던 상황을 상세히 묘사했다. 안 그래도 문체와 가치관에서 크게 동질감을 느끼던 그는, 저자가 직접 겪고 묘사한 경험들에서도 동질감을 느낀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매일 새벽마다 구빈소를 찾아가 배급을 받던 상황, 한 곳으로는 여의치 않아 구빈소 여러 곳을 최대한 많이 들리려 부지런히 걸었던 상황, 같은 경로로 구빈소를 도는 이들과 아예 친구가 된 상황, 타 지역 구빈소를 갈 때마다 받았던 터줏대감들의 눈초리, 간신히 접시닦이 일을 구했을 때, 열기로 푹푹 찌는 주방에서 땀범벅이 되어 시큼한 소스 냄새를 맡으며 식기세척기 앞에서 10시간 넘게 보냈던 때 등의 생생한 묘사가 그를 자극한다. 이러한 묘사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시절을 떠오르게 했다. 그도 호주에서 악착같이 돈을 아끼고자 했고, 접시닦이 일도 했었다. 그가 찾던 완벽한 정답은 아니었지만, 그는 나름 자신과 닮은 사람을 찾았다.


닮은 사람을 찾고 난 뒤, 그에게 약간의 변화가 일어난다. 동질감이 느껴지는 경험을, 동질감이 느껴지는 어투/묘사 방식/이야기 전개/가치관으로 써나간 저자를 발견했다. 열정적으로 조지 오웰의 책을 읽던 그의 내면에서, 조심스레 한 가지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는, 자신도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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