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번째 기업, 31번째 면접
Vlookup
면접은 넓은 회의실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짙은 갈색의 커다란 책상이 한가운데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폭이 넓어서, 그와 면접관들 사이의 거리가 약 2m가 넘는다. 면접관들 뒤로 커다란 창이 위치하는데,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이 없어서 저 멀리 아파트 단지와 허허벌판, 푸른 하늘이 선명하게 보인다.
26번째 기업, 경영기획팀 Planning&Controlling 내 귀금속 파트 신입 면접
면접자 : 그 혼자
면접관 : 총 3명 (남자 2 / 여자 1)
좌측, 구릿빛 피부에 덥수룩한 머리, 순한 인상으로 바다 청년 같은 30대 남자 면접관 1
중앙, 면접관 중 가장 포스가 있어 팀장으로 추측되며, 테가 얇은 네모 안경, 옆머리가 짧고 윗머리는 무언가를 발라 세웠으며, 지적이고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40대 남자 면접관 2
우측, 피부가 하얀 여자 면접관 3
첫인상처럼, 면접관 2가 가장 나이가 많고 면접관들 중 지위가 가장 높은 듯하다. 분위기상 면접관 2가 면접의 핵심이다.
그 : 안녕하십니까!
면접관 일동 : 안녕하세요. 자리에 앉으세요.
그 : (자리에 앉는다)
면접관 3 : 반가워요. 사시는 곳이 좀 멀던데, 어떻게 오셨나요? 오는 길은 괜찮으시던가요? 오늘 컨디션은 어떠세요?
그 : 네, 지하철 타고 환승해서 OO역에 도착한 뒤, 걸어서 왔습니다. 시간은 얼마 정도 걸렸으며, 편안하게 잘 왔습니다. 컨디션은, 오늘 제가 바라는 26번째 기업에 면접을 보러 오는 것이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립서비스다)
면접관 일동 : 허허하하호호~
면접관 3 : 네 그럼,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그 : 네, 안녕하십니까! 26번째 기업 경영기획 귀금속 파트에 지원한 하. 얀. 얼. 굴.입니다! 저는 2가지 강점을 통해 저를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한 실천력입니다. 저는 호주 워킹... ... 두 번째, 친화력입니다. 저는 취미 생활인 공놀이를 통해... ... 이상 두 가지 강점, 강한 실천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26번째 기업에 기여하고자 하는 지원자 하. 얀. 얼. 굴.입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2 : 네, 반가워요. 하얀 얼굴 씨, 취미가 독서라고 했는데,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뭔가요?
그 : 네,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자서전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약간 아쉬운 대답이다.
면접관 1 : 건축 쪽에 흥미가 있나요? 자격증에도 건축 관련 자격증이 있던데요.
그 : 아, 해당 자격증은 군대에서 작업하다가 취득한 것입니다. 건축이라기보다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 실물 경제에 관심이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관 2 : 졸업 이후 취업을 준비하고 계실 텐데, 어느 직무로 지원하고 있나요?
그 : 네, 기획과 해외영업 위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면접관 2 : 하얀 얼굴 씨, 본인이 생각하는 기획이란 무엇인가요?
그 : 제가 생각하는 기획이란,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다른 구성원들과 공유하며 함께 나아가게끔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첨부드린 도서 파일을 예시로 드리겠습니다. 도서 목록 작성을 통해 흩어져 있던 독서 활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독서 목표와 방향을 설정했습니다. 혼자서 한 것이라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소통하진 못했습니다만, 기획의 일부를 경험해보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면접관 2 : 면접 준비를 하면서 조사를 해보셨을 텐데요. 저희 회사와 귀금속에 대해 알아온 것을 말해보세요.
그 : 네, 26번째 기업은 외국의 소재, 재활용 기업인 XXX의 한국 사업부 중 자동차 촉매 사업부에 속하는 기업입니다. 영위하는 사업으로는 자동차 촉매 사업, 이차전지 사업이 있습니다. 귀금속에 대해서도 조사해보았습니다. 귀금속은 금, 은, 백금, 팔라듐, 이리듐, 로듐, 루테늄이 있습니다. 귀금속의 경우 무게 단위를 트라이온스로 가격도 달러로 표시합니다. 귀금속의 오늘 시세를 확인해본 바로는, 국제 금 가격은 트라이온스당 1910달러 / 은 가격이 트라이온스당 28달러 / 백금이 1191달러 / 팔라듐이 2844달러입니다. 국내 금 가격은 g당 68000원입니다.
면접관 2 : (건조한 눈빛, 별 반응이 없다)
그는 열심히 외워온 자료로 어필했으나, 면접관 2의 반응은 없다시피 한다. 그는 이때부터 무언가 불안함을 직감한다. 이후 면접관 2는 조금씩, 핸드폰을 보기 시작한다. 그는 면접관 2의 현업 업무가 바쁘겠거니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다.
면접관 3: 하얀 얼굴 씨, 다른 곳도 면접 진행 중인 곳이 있나요? 몇 군데나 있나요? 그리고 혹시 떨어졌다면, 떨어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1/11/25번째 기업을 이야기하기로 결정한다.
그 : 네, 지금까지 3곳을 지원했습니다. 2곳은 떨어졌고, 1곳은 사실 최종 합격했습니다만, 오늘 일정이 겹쳐셔 입사를 포기하고 면접에 참석했습니다. 떨어진 이유는, 당연히 제가 어필을 잘하지 못한 것, 그리고 다른 유능한 지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탈락의 경우는 경쟁자 중 주재원 가족이 많았으며 해외 거주 경험이 7년 이상인 인원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 탈락의 경우는, 해당 기업이 러시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을 필요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3: 영어는 얼마나 하나요?
그 : 네이티브까지는 아니지만, 해외 유학파와 비슷하거나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3 : 본인이 기획 파트에 뽑혀야 할 이유를 영어로 말해보세요.
그 : (약간 당황한다) K, The reason why I need t be hired to Planning department is, as I said when I introduce myself, my 2 strong points, Power of execution and sociability. Working as a planning staff, I think my strengths would be fit to job description and also beneficial for your company. So, I think, my 2 strong points is the reason why I need to hired to planning position. (영어 대답을 준비하지 않은 질문이라 버벅거리긴 했지만 전달할 말은 모두 전달했다)
면접관 1 : 하얀 얼굴 씨, 희망연봉을 6000만 원이라고 기재하셨는데. 이 금액을 어떻게 산출한 건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그 : (준비된 질문이다) 네, 해당 연봉은, 저의 포부와 가치를 반영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실물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 큰 가치를 갖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금융업에 종사하는 제 친구가, 취업에 성공하여 처음으로 받은 연봉이 6000만 원이었습니다. 금융업도 중요하지만, 저는 금융업의 근간이 되는 것은 결국 실물 경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실물 경제에 종사하시는 분들 또한 연봉 6000만 원을 받을 만한 가치의 일을 한다는 의미에서 적었습니다. 또한, 아무래도 친구가 받은 첫 연봉이다 보니, 나름 경쟁심에 상징적으로 잡은 금액이기도 합니다. 채용 공고를 보니, 연봉이 4000만 원으로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해당 금액도 저로서는, 너무나도 감사한 금액입니다.
면접관 2 : (핸드폰을 내려놓고) 하얀 얼굴 씨, 대학교 수업도 듣고 하면서 아무래도 엑셀을 써보셨을 거 같네요. 현업을 하다 보면 엑셀이 참 중요합니다. 엑셀 잘하나요?
그 : 잘은 아니지만, 보통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면접관 2 : 음, 엑셀에서 Vlookup 함수가 무엇인지 말해보세요.
그 : (기억이 나지 않아 심히 당황한다) 아, Vlookup 말씀이십니까... 죄송합니다, 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면접이 끝나간다.
면접관 1 : 면접 준비를 하시면서, 궁금한 점이 있었다면 물어보세요.
그 : (어떻게든 어필하고자 발악하며) 배기가스 장치에는 SCR / EGR / DPF 방식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26번째 기업은 전기 탈 것 타겟이므로 조금 다릅니다만, 최근 정부가 시행하는 DPF 저감 장치에도 26번째 기업이 생산하는 부품이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면접관 1 : 아, 정부 지원 장치에요? 음, 해당 부분은.. 우리 회사 제품이 들어가던가요? 음... 저는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음... (면접관 2를 힐끗 본다)
면접관 2 : (핸드폰을 하고 있다)
면접관 1 : (잠시 기다린다)
면접관 2 : (핸드폰을 내려놓고, 졸다가 깬 사람마냥) ...음? 아, 정부 지원 사업이요. 해당 사업에는, 저희 부품이 따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그 :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면접관 2 : 네 마지막으로, 하얀 얼굴 씨 롤모델이 누구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하세요.
그 : 네, 저는 롤모델로, 조던 피터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방향을 잃고 방황할 수 있었던 때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도록 해준 인물입니다. 오늘 이렇게 면접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면저 준비를 많이 하면서, 제 자신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까 면접관님께서 물어보신 Vlookup에 대해 답변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Vlookup, Hlookup 모두 제가 알고 있는 기능인데 답변을 못 드렸습니다. 더욱 철저히 숙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면접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면접관 2 : 네, 수고하셨습니다.
면접이 끝났다. 면접비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임시 출입증을 반납하고 밖으로 나온다. 면접에 걸린 시간은 약 30분, 여전히 해가 화창하고 하늘은 푸르다.
올 때는 면접 시간에 꼭 맞춰야 하기 때문에 지하철로 왔지만, 갈 때는 시간제한이 없다. 그는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버스를 선택한다. 주변 버스 정류장을 검색한 뒤, 버스를 기다린다. 인적이 드문 공업단지의 텅 빈 도로, 약 10분 정도 햇볕을 쐬고 있자니 버스가 도착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는 면접에 대해 생각한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쁘진 않았다. 답변도 할 만큼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전달했다. 다만, 면접관 2의 태도가 무언가 께름칙하다. 면접관 2는, 그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외워온 자료를 외우는 데도 관심이 없어보였고 이후로는 자꾸만 핸드폰을 쳐다봤다. 특히나 마지막에 Vlookup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면서, 면접 결과는 더욱더 미궁 속으로 빠졌다.
그는 대학교 생활 내내 엑셀을 써본 적이 없다. 교양이나 무슨 수업 시간에 잠깐 듣기는 했지만, 현업 실무 수준으로 써본 적은 없다. 학점을 받기 위해, 무슨 함수를 억지로 한 번 써보고는 곧바로 까먹은 정도다. 그가 현재 쓸 수 있는 엑셀 함수는 Sum 하나일 뿐, 다른 함수들은 이름만 안다.
하지만 신입 면접에서, 엑셀 함수 하나를 모른다고 탈락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는 귀금속의 종류와 가격, 26번째 기업과 귀금속 촉매의 역사까지 달달 외웠다. 그 모든 노력보다 엑셀 Vlookup 기능이 더 중요한 것인지, 그는 잘 모르겠다. 만일 떨어진다면, Vlookup을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일까. 그는 잘 모르겠다.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았으니, 우선은 머리를 비운다.
약 1주일 뒤, 26번째 기업으로부터 면접 결과가 도착한다.
1차 면접 불합격
몇날며칠 밤을 새웠던 면접 준비가 물거품이 된다. 최종합격한 6개월 계약직을 포기하면서 그는 배수의 진을 쳤다. 등 뒤에, 도망칠 수 없는 강을 두어서 전투력을 높이려는 각오였다. 그런데, 배수의 진 상태에서 그는 적을 이겨낸 것이 아니라 적에게 밀려 등 뒤의 물에 빠져 죽은 셈이 되었다.
6개월 계약직을 걷어차버린 것쯤이야, 6개월 이내로 취업을 하면 될 것이다. 6개월 내로는 될 것이다. 아니, 할 수 있을까? 26번째 기업에서의 이번 면접 탈락 이유가 무엇일까. Vlookup을 몰라서였나, 영어가 모자랐나, 읽은 책을 잘못 말했나, 다른 기업에서 떨어졌다고 해서인가, 인턴 경험이 없어서인가, 학점이 모자라서인가, 그의 외모가 별로였나.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앞으로 면접 합격을 위해서는 뭘 어떻게 더 보완해야 하나. 그것도 잘 모르겠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무엇을 모르는지도 잘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