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성 업무, 자동화
그가 다니는 회사의 특성인지, 그가 속한 팀의 속성인지, 초창기 그의 기억에는 일회성 업무가 많았다. 이 업무는 왜 하는 것이냐고 물으면, 팀 상사들은 위의 관리팀들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전염병 업무 전담자로, 당시 그는 팀 과장들의 업무에는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그에게 과장들이 업무 보조 요청을 한다는 것은, 사안이 꽤나 급박하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당시에 그렇게 급박한 분위기에 처리했던 업무들은, 노력이 무색하게도 한두 달 뒤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곤 했다. 방식이나 양식이 변하는 게 아니라, 업무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꽤 있었다.
어느 날, U 과장 주변에 파견직 직원들이 모여 시끌시끌하다.
U 과장 : 이걸 지난달에 어떻게 처리했다고?
W2 사원 : 이게...
W-2 사원 : 지난달에는 이렇게 했고요. 이번에는 양식을 다르게 해달라고 반려받았어요.
U 과장 : ...
T 과장 : 왜? 무슨 일이야?
U 과장 : 재무팀에서, 돈 어디에 얼마 나가는지를 매월 다 적어서 제출하라고 하는 것 같은데
T 과장 : 업체가 몇 갠데, 그걸 다 적으라고?
U 과장 : 다 적어서, 임원들 결재까지 받아오라는가봐
T 과장 : 아니...
U 과장 : 얼굴아, 바빠?
그 : 아닙니다!
U 과장 : 이거, 파일 하나 보내줄 테니까 작업 부탁해. 첫 번째 파일에 있는 리스트를, 두 번째 파일 양식에 맞춰서 작성해야 해.
그 : 알겠습니다!
U 과장은 그에게 두 개의 파일을 보낸다.
1) 회사 시스템에서 출력한 매입전표 처리 내역
2) 재무팀에서 요구하는 '자금집행대장' 양식
1번 파일은 매입전표(원가, 즉 돈을 지급하는 전표) 리스트로, 해당 월에 지급하는 돈에 대한 온갖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전표번호 / 작성자 / 승인자 / 작성부서 / 계정과목 / 금액 / 거래처 업태 / 적요(내용) 등이다. 재무팀에서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표내역 출력은 정보가 너무 많으니 자신들이 보기 좋게끔 필요한 정보만 빼내어서 정리하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정한 양식으로, 그리고 이 금액에 대해서 확인했다는 IT 임원들의 서명까지 더해서 말이다.
IT사업부에서는 밖으로 지급하는 돈이 상당히 많다. 특히 Cloud 비즈니스의 경우, 그의 회사는 자체 상품이 아니라 다른 회사의 상품을 재판매하는 형식이다. 금액을 지급해야 할 곳도 많고, 건수도 많고, 금액도 크다. 전표 리스트만 해도 300행을 훌쩍 넘어간다. 제외할 것을 제외해도 대략 200행, A4 한 페이지에 세로로 200줄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으면 대여섯, 많으면 열 장 가까이 출력해야 한다. 원래 재무팀에서는 이 '자금집행대장'의 각 장마다 임원들의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나 보다. 다행히도 T 과장이 협상하여, 맨 앞 페이지에만 서명하는 것으로 막았다.
지난달에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니, 파견직원들은 전표내역 파일에서 복사-붙여넣기를 하여 옮겼다고 한다. 대략 100~200 행의 4가지 정보(거래처 / 계정과목 / 지급 금액 / 비고)를 기입해야 하니, 복사-붙여넣기만 400~800번 시행해야 한다. 그는 너무나도 방대한 단순 작업에 말을 잃었지만, 파견직원은 1시간도 안 걸린다고 말한다.
훗날 다시 생각해보면, 파견직원의 이 단순 작업 수행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었다. 그는 자동화 틀을 통해, 전표내역 전체를 붙여 넣으면 최대한 자동으로 내용이 옮겨지게끔 구축하려 애썼다. 엑셀의 '다른 셀 참조', 'Vlookup' 등의 기능을 활용하면 가능하다. 다만, 이 자동화가 100% 구현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자동화를 구현하기 위해 함수를 짜는 등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차라리 그 시간에 반복 작업으로 후딱 처리하고 다른 일을 진행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해당 파견직원은 후자를 택했고, 반복된 수작업에도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해 왔다.
그는 약 3시간 가량을 자동화 구축에 매달렸다. 당시 그의 엑셀 활용 수준이 보통 이하였던 것도 크게 한몫하였다. 그는 신입사원이었고, 그때까지 맡았던 업무 대부분이 엑셀을 쓰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 진행한 '자금집행대장 업무 엑셀 자동화' 노력은, 최초의 엑셀 활용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나름 의의가 있다.
자금집행대장에는 4가지 정보만 들어가야 하며, 각 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주식회사 IT솔루션 제공 / 원가)라이선스 / X,XXX,XXX 원 / IT솔루션 라이선스 비용
그는 '자금집행대장' 엑셀 파일에 전표 내역 전체를 복사하여 붙여넣는다. 그리고는 표의 칸마다 수식을 걸어 자동으로 기입되게 할 심산이다.
첫 번째 칸(거래처명) : 전표내역에서 지급처 열의 내용을 가져와라
두 번째 칸(계정과목) : 전표내역에서 계정과목 열의 내용을 가져와라
세 번째 칸(금액) : 전표내역에서 공급가액 열의 내용을 가져와라
네 번째 칸(내용) : 전표내역에서 비고 열의 내용을 가져와라
맨 위 칸에만 작업을 완료한 뒤, 해당 수식을 아래로 쭉 긁어내린다. 이 경우 위 칸의 수식이 자동으로 복사되어 내려가며 알맞게 적용이 된다. 한방에 원하는 결과물이 나왔으면 좋았겠으나, 결과는 절반의 성공이다. 거래처명과 금액은 성공했지만, 나머지 둘은 실패했다. 그가 적용한 수식은, 전표내역 해당 칸의 정보를 모조리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거래처와 금액은 그대로 가져와도 되지만, 계정과목과 비고는 그렇지 않다. 계정과목은 가장 큰 분류의 계정과목명만 가져와야 하고, 비고 또한 칸에 맞게끔 중간에 끊어야 한다.
훗날의 그였다면,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나머지는 수작업으로 진행했을 것이다. 완전 자동화는 아니지만 반자동화 반열에는 올랐다. 복사-붙여넣기를 절반으로 줄이는 지점에서 만족하는 것이다. 원래 100% 자동화라는 것은 변수가 많아 불가능에 가까우며, 만일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를 구현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당시의 그는 이를 알지 못했다. 그는 나머지 둘, 계정과목과 비고에서도 완전 자동화를 구현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서 작업이 점점 산으로 가기 시작한다.
계정명의 경우, 대분류까지만 가져와야 한다. 원가 지급 금액의 계정과목은 대략 4~5개 정도인데, 각각 글자수가 다르다. 또한 계정과목이 상품명을 포함하기 때문에, 글자수는 더욱 불규칙적으로 요동친다. 그는 굳이 이 지점을 규칙과 원칙으로 잡아내려 하고 있다.
1) 계정과목
- LEFT함수(해당 칸의 왼쪽부터 문자를 가져오는 함수)를 써서 5글자만 가져오도록 조치
- 계정과목 이름이 긴 경우 중간에 과목명이 잘리는 현상 발생. LEFT함수로 8글자를 가져오도록 변경
- 너무 길어서 뒤에 필요 없는 내용까지 가져오는 경우 발생. LEFT함수를 6글자로 하향 조정.
- 필요한 내용은 모두 나오나, 계정과목이 짧은 경우 뒤의 불필요 정보까지 출력.
- 해당 부분까지 조정하려 했으나, 실패.
2) 비고
- 적요의 내용을 모두 가져오도록 했으나, 너무 길어서 양식의 칸을 초과
- LEFT함수로 글자수를 조정
- 칸에 모두 들어오긴 하나, 적요 자체가 긴 경우 무슨 정보인지 판단이 불가
- 실패.
몇 시간이고 작업했으나, 자동화는 70% 수준에서 진척이 없다. 그는 결국 타협한다. 자동화로 필요한 정보가 다 나오게끔만 세팅하고, 정보가 과한 부분은 수작업으로 깎아내는 것을 택한다. 정보가 과하면 읽고 판단하여 깎아낼 수 있지만, 정보를 아예 덜 가져와버리면 작업 자체가 불가하다
나름 열심히 작업한 이른바 '자금집행대장 자동화 파일'을 W-2 사원에게 전달한다. W2사원의 분량은, 자동화 툴을 만들면서 그가 대신 진행한 상태다. 다른 상품을 맡은 W-2 사원에게, 자동화 파일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알려준다. 전표내역을 복사해서 붙여넣기하면 1차적으로 정보가 자동 기입된다. 이 중에서 계정과목과 비고만 수작업으로 정보를 깎아주는 방식이다.
W-2 사원은, 별 반응이 없다. 그의 '자동화 툴'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기존에 이미 잘하고 있었는데, 왜 굳이 방식을 바꿔야하느냐는 저항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후 20분도 되지 않아, W-2 사원은 자금집행대장 작업을 완료하고 출력을 진행한다.
그 : 자금집행대장 완료하셨어요?
W-2 : 네. 주신 파일로 했어요.
그 : 빨리 하셨네요.
W-2 : 네, 주신 파일에다가 말씀하신대로 전표내역 붙여넣고, 계정과목이랑 비고만 손봤어요.
그가 제작하여 배포한 '자동화 툴'로 인한 결과이지만, 놀라움을 넘어 일종의 경계심까지 느껴졌다. 도구 자체에는 관심이 없어보이나, 막상 도구가 쥐어지면 제작자보다 더 잘 쓰는 타입이라고나 할까. 그는 W-2 사원을 소위 말하는 '일잘러' 범주로 인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