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뽑은 이유, 학벌
그는 T 과장이 자신과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같은 대학교 같은 과 선배다. 물론, 그가 학생인 시절에 T 과장은 이미 졸업한 지 오래였으니 캠퍼스에서 마주친 적은 없다.
T 과장 : 저번에 이야기했지만, 얼굴이 너가 나랑 같은 대학교잖아.
그 : 네!
T 과장 : 그때 너 면접 봤을 때, 팀장님이 면접 보고 오시더니 마음에 드는 애가 있다고 하셨어.
그 : 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야기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T 과장 : 그때 이력서를 세 개 가져오셨거든. 이 셋이 괜찮아 보이는데. 누가 좋겠느냐고. 팀장님도 나름 원하시는 바가 있었겠지만, 결국 일은 우리랑 같이 해야 되니까. 그래서 이력서를 봤지. 다들 비슷비슷했어. 나는 얼굴이 너가 좋겠다고 했지. 운동 좋아한다는 얘기도 있고. 또 대학교도 나랑 같은 학교니까. 아무래도 같은 학교인 게 낫지.
그 : 아...
T 과장 : U야 뭐, 셋 다 괜찮다고 했어.
그의 머릿속에, 셋 다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U 과장의 모습이 그려진다.
T 과장 : 원래 너가 재무로 지원했잖아? 팀장님은 처음부터 너를 찍었는데. 다행히 재무에서 딴 애를 데려간 거지. 그리고 두 번째가 경영기획팀이었어. 경영기획팀에서 데려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포기해야 하는 거였는데, 다행히도 경영기획팀에서는 경력 뽑겠다고 해서 우리한테 차례가 왔지. 그래서 잘됐다 하면서 바로 널 뽑았지.
그 : 아...
이후에도 T 과장이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그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S 팀장에게 들었던 이야기에, T 과장의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장면이 재구성된다. 그의 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다름 아닌 T 과장이다. 그가 충성해야 할 보다 근본적인 인물은, S 팀장이 아닌 T 과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T 과장이 이야기한 합격 사유가 의아하다. 의아하다 못해, 불만족스러울 정도다. 이런저런 칭찬이 덧붙긴 했지만, 결국 같은 학교여서 뽑았다는 말 아닌가. 안 좋게 말하자면 학연이다.
학연이고 자시고, 일단 들어가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이유가 어쨌든 간에, 합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무한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닐까. 취업 과정이 어지간했다면 그도 수긍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결론짓고 감사하기엔, 그의 취업 과정은 너무 길고 지난했다.
졸업을 유예해 가면서까지, 본격적으로 구직 활동에 뛰어든 기간만 자그마치 2년 가까이 된다. 면접으로 만난 기업만 41개, 공식 면접 횟수 55차례, 이중 최종 면접 탈락도 수 차례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의 탓이라 여겼다. 그렇게 여겨야만 했다. 외부 탓으로 돌린다면, 움직일 수 있는 마지막 동력을 상실해 버릴 것이기에.
2년간 쏟아지는 면접 탈락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외부, 남 탓이 아니다. 내 탓이다. 모든 게 다 내 탓이고, 내가 부족해서다. 뭐가 부족한지는 모르겠지만, 다 내 탓이다. 뭐든지 보완하고 수정하고 외워서 나아지면 취업이 되겠지. 화장을 해볼까. 정장을 바꿔볼까. 인재상을 달달 외워볼까. 회사 재무제표 숫자를 외워볼까. 제품명을 외워볼까. 회사 연혁을 외워볼까. 대표이사 경력을 외워볼까. 회장 생년월일을 외워볼까. 등산 후 막걸리 마시는 게 취미라고 대답해 볼까.
그렇게 버티고 버텨,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그를 뽑아준 기업은, 그가 지금껏 해온 노력을 알아준 것이 아닌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그를 보아준 회사, 충성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던 그다. 그런데, 눈앞의 T 과장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가 뽑힌 이유는 단순히 학벌이다. 그렇다면, 2년의 취업 기간 동안 쏟아부은 그의 노력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T 과장에 대한 반감은 아니다. 하지만 T 과장의 말에 그는,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노력했던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겨우 같은 대학교라서 뽑혔다라. 허탈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의 진면목을 봐주고 알아줘서 뽑은 게 아니라면, 그도 굳이 애정과 충성을 다할 필요가 있을까?
콩깍지가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