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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 Gyeol Dec 23. 2021

[001] 하울이 소피가 되기까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나에겐 재수가 끝나고 매일 밤 할 일이 없는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운 날이 있었다. 내일 일어나면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채워야 할지 막막했다. 시간을 보내야 정시 발표도 나고 할 일이 생길 텐데 시간이 가질 않았다. 그저 흘려보내는 시간이 죄스러웠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또 탈락했다는 통보를 받을 아침이 무서웠다. 아침이 무서워지니 점점 늦게 자기 시작했다. 밤새 천장을 쳐다보고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계속 내가 왜 수능을 실패했나 되새김질을 했다. 내가 너무 나태하게 살지는 않았나, 개념을 소홀히 생각했나, 너무 자만하지는 않았나 이런 말들이 머리를 맴돈다. 이 상념의 끝에 다다르는 것은 어느새 죽을 죄를 지은 자신과 두려운 아침뿐이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햇빛이 들어올 때면 그제야 잠이 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잠에 들면 꼭 악몽을 꿨다. 꿈에선 항상 같은 악몽이 반복된다.  

   재수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던 2년 전 고3 겨울 방학 중에 눈이 쏟아지던 날 정시 상담을 하러 학교에 갔었다. 등교할 때와 다르게 사복을 입고 학교를 가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뵙는 담임 선생님이라 기분 좋게 교무실을 두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선생님 옆자리에 앉자마자 앞으로 계획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셨다. 머뭇거리면서 내가 재수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듣자마자 선생님께선 나에게 넌 해봤자 조금씩 오르고 말 텐데 뭐하러 재수를 하냐고 여자가 아무 대학이나 가서 결혼이나 하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할 말이 없었다. 선생님이 어떻게 아시냐고 공부하는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고 앞으로 내가 어떨지 모르시지 않냐는 말이 목에 걸렸다. 하지만, 난 훌륭한 학생이어야 하니까 선생님께 한 번 더 해보고 싶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여성 취업률에 대해 한 시간이나 말씀하셨다. 물론 귀에 담지 않았다. 난 이미 성차별적 발언에 화가 났고 가능성을 밟아 버리는 말에 상처를 받았다. 들리지도 않는 말을 들으며 한 시간 동안 화를 삭인 후에 인사를 드리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내가 오늘 입은 사복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생각했다.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집에 오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는데 엄마가 선생님 말씀은 무시하라고 하셨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까 눈물이 났다. 울고 있냐고 물어보는 엄마의 목소리에 아니라고 추워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침에 차를 타고 간 학교를 걸어서 집에 왔다. 걸으면서 재수를 성공하겠다고 추운 날씨만큼 시리게 다짐했다. 재수 성공해서 당당하게 이 길을 걸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마음에 새겼었다.

   망할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재수 초반 내내 졸리던 나를 깨워주는 훌륭한 자극제였다. 졸리면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그 목소리는 봄과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눈이 오는 겨울이 왔고, 정말 선생님 말씀처럼 실패를 한 나는 매일 밤마다 꿈에서 선생님이 하는 폭언을 들었다. 악몽에선 이미 너무 많이 되풀이돼서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눈물만 흘리며 한마디도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악몽을 꾸고 오후에 일어나면 겨울이라 짧아진 해는 벌써 지고 있었다. 해가 졌으니 4시간만 지나면 다시 밤이 됐다. 또다시 내일은 할 일이 있나 생각을 하고 밝은 해가 뜨면 이룬 것이 하나 없는 한심한 나는 선생님을 만나러 계단을 오른다.

     무거운 겨울을 보내고 들어간 대학은 즐거웠다. 답이 정해지지 않은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께선 나에게 결과를 요구하시지 않았고, 답이 정해진 전공수업은 시험 하나로 나를 나태한 사람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내 노력이 그대로 결과로 반영되자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분명 미디어아트가 하고 싶다. 애써 현실에 안주하고자 눌러왔던 마음이 종강 날 터져버렸다. 하고자 하는 신념은 나를 다시 입시로 밀어 넣었다. 그 이후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성적은 아니지만, 신념을 가진 나는 한걸음 더 꿈과 가까운 전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소피는 크게 다섯 가지 순간에 저주에서 벗어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1. 궁안에서 하울의 무고함을 주장할 때

2. 하울이 아픈 꿈 안에서 그를 도와주고 싶다고 할 때

3. 이사 후 자신의 방을 확인했을 때

4. 하울의 아지트에서 풍경을 감상할 때부터 하울에게 곁에 남고 싶다는 의견을 말할 때

5. 공습경보 후 가게를 지키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하울을 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3번째는 회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머지 4가지 경우는 모두 수동적이었던 소피가 의지를 가지고 신념을 보이는 장면이다. 하울은 악마가 아니라는 믿음, 그를 도와주겠다는 의지, 그의 곁에 남아 도와주고 싶은 선의, 자신이 가꾸던 가게를 지키겠단 생각이 모여 신념을 만들었다. 중반부까지는 소피의 자유가 저주라고 생각했다. 아지트 풍경을 보며 해방감을 느낄 때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는 적극적인 자유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울의 곁에 남고 싶다고 주장하다가 하울이 외모에 대한 칭찬을 하자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소피는 스스로 자신의 외모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다시 저주가 통한다고 생각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우리의 내면을 담았다. 황야의 마녀였던 할머니는 끝까지 일을 방해하고 심장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는 탐욕이고, 황야에서 지독하게 외로웠던 할머니가 갈망하는 것은 심장 즉, 마음이다. 이웃나라 왕자였던 허수아비는 소피의 선의이고 어린아이인 마르클은 우리의 미숙한 어린 시절을 담았다. 이후는 조심스러운 추측이지만, 불꽃 형태의 악마 캘시퍼는 하울의 심장을 가지고 잡혀 있는 상황이다. 항상 탈출을 꿈꾸지만 정작 풀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두려워하며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이런 점에서 캘시퍼는 내면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갇혀 있을 땐 항상 탈출을 꿈꾸지만, 다시 돌아온 캘시퍼처럼 정작 나가서는 설 자리를 잃고 방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의, 동심, 탐욕, 자유를 담은 하울의 성은 내면 그 자체이다. 마지막엔 신념을 가진 소피가 성에 와서 성의 주인인 하울에게 마음을 담아주었으니 하울의 내면인 하울의 성은 움직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소피의 저주는 풀렸을까? 캘시퍼가 자신의 저주를 풀어주면 소피의 저주 또한 풀어주겠다고 거래를 했으니, 나중에 풀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거래가 해방을 원해서 한 거짓인진 캘시퍼만이 알 일이다. 주체적으로 움직여서 승리한 소피는 어쩌면 계속 할머니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타인에 대한 선의뿐만 아니라 나의 성은 무엇으로 움직이고 있는 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나의 삶은 신념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목표를 향한 도전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혹은 움직이지 않고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어린 시절의 꿈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동력이 무엇인지 길을 잃었을 때 목표를 상기시켜주는 지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끝으로 길을 잃은 당신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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