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은 중학교가 문을 연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어쩌면 학교 입장에선 가장 큰 명절이었다. 이날을 기념하는 방식은 학교마다 달랐다. 글짓기 ㆍ웅변대회ㆍ포스터ㆍ표어짓기 등이 대세였다. 그런데 이 설립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즐기는 뜀박질 부문인 ‘마라톤대회’만을 고집했다.
땅콩밭 수준의 모래 마당을 출발하여 이웃 관내 박계리 소재 교량을 반환점으로 정하고 돌아오는 왕복 10킬로미터 중장거리 달음박질 대회였다. 본인이 이 부문의 마니아란 오직 하나가 이를 채택한 전부의 이유로 보였다. 설립자는 개인 사정상 초등학교를 같은 또래 친구들 대비 서너 해 늦게 입학을 한 마라톤 선수를 영입하여 이 기념 달음박질 대회의 위상을 끌어올리고자 했다. 결국은 특정한 1인 만을 위한 잔치로 전락했다.
내가 중 3 시절엔 이른바 ‘접어주는 경기’란 기발한 아이디어도 발굴했다. 전교생이 모두 동시에 출발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이 선수를 나중에 출발시켰다. 아니면 다른 학생들과 제법 거리가 떨어진 뒤편에 출발점을 정하는 규칙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즉 거리상 훨씬 뒷부분에 처진 곳을 이 선수의 출발점으로 정했다.
뜀박질에 선천적으로 재능이 따라 주지 않는 학생에겐 이 대회에 참여하는 자체가 죽을 맛이었다. 이 시즌만 돌아오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다. 이에 나도 해당됨은 물론이었다. 설립자는 나중엔 체육 과목 수업 내지 시험 점수를 이 대회와 연계시켰다. 또 한 번 이 대회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았다.
뜀박질을 잘하고 좋아하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학생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설립자 본인이 만족하고 희열을 느끼거나 자신에게 두 손을 들고 굴복하여 군소리 없이 모든 부문에서 백의종군(?) 토록 하는 음모를 구상한 듯했다. 나는 이러한 엄청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고심하던 중 개교기념일 당일 하루 무단결석을 하기로 했다. 아예 처음부터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당일 학교의 가장 커다란 잔치 행사에 빠진 학생 명단을 들추던 중 내 이름이 설립자의 눈에 쉽게 눈에 들어왔다. 이에 설립자는 드디어 한 단계 훨씬 높은 이른바 비상대권을 발동했다. 이번 월례고사 체육 시험은 이 뜀박질의 성적으로 채점을 하겠다는 고금동서를 통틀어 전무후무하고 무시무시한 결정이었다. 사전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았고 일방적이며 전격적으로 비상대권을 발동했다. 마라톤대회를 마친 이후의 결정이다 보니 해당 건의 직접 이해 당사자에게 사전 고지도 않는 소급적인 결정이었다. 이는 소급효를 금지한 민주국가 법체계를 근복적으로 흔드는 위법한 결정이었다. 깡패집단의 무모한 행태로 보이기도 했다.
이에 나는 이번 달 성적표의 체육과목 점수란에 기본만 받는 40이란 점수를 자랑스러운 기록으로 남겼다. 그래서 반의 석차가 처음으로 두 자릿수에 랭크되는 기절초풍할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나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의 충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같은 부락 절친 춘석, 경철이와 함께 1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집안 대대로 내력이 전혀 없는 ‘가출’을 감행했다. 바야흐로 나는 이미 망가진 학생이 되었고 비행 청소년이 된 것이었다. 일주일 간 가정실습 시간을 활용했다. 목재 재질 나룻배 신세를 지어 비단강을 건너서도 20여 분을 더 걸어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이름도 정겨운 ‘서밭탱이’에 살고 있는 친구 종성이네로 2박 3일 동안의 계획에 없던 가출 여행의 장도에 올랐다.
고교입시제도란 것이 당시엔 총점 200점 만점을 기준으로 시도별로 이른바 공동 출제시스템이었다. 체력장제도란 것이 있어 이는 20점이 배정되었다. 체력장은 총점 대비 10%나 차지하여 결코 무시 못할 비중이란 건 누구나 인정했다. 이 체력장 준비를 한다는 구실이었다. 40일 전후인 여름방학 내내 중 3 생 학생들은 학교에 나올 것을 강요당했다. 이 또한 설립자의 의중이 반영된 것임은 물론이었다.
체력장 훈련이란 좋게 말하면 명분이었고 거칠게 이르면 핑곗거리였다. 설립자는 이 부문에도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를 했다. 고교 입시에서 체력장의 비중이 높다는 걸 전면에 내세우며 여름방학 기간 동안 집중하여 체력장 대비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전 일반교과 2시간 수업을 마친 후 오래 달리기(1,000미터) 연습을 이어갔고 오후엔 또 추가로 2시간의 일반 교과목 수업이란 방학기간 동안 스케줄을 마련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 보는 아주 특이한 일종의 방학기간 커리큘럼이었다. 이는 무엇이 크고 작은 걸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에 ‘뭣이 중한데?’ 방식으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 나는 담임 선생님과 체육 선생님을 번갈아 개별 면담했다. 40일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지만 대전 소재 학원의 단기 유학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보기 좋게 단칼에 거절을 당했다. 이 것도 역시 최종 결정권자는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설립자였다.
이 여름방학 동안의 체력장 집중훈련이란 것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다. 한낮의 기온이 30도 이상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여름 뙤약볕 아래 체력장 8개 종목 중 하나에 불과한 오래 달리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완주케 했다. 10대 초반의 어린 중학생들 체력에 비추어 너무 가혹한 훈련을 강요했다. 모든 중학생이 장차 체육고나 체대 지망생도 아니거니와 더욱이 이 학교는 체육전문 중학교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탕콩 발 수준 모래밭이 운동장이었다. 이러니 모래밭 위에서 무더위를 온몸으로 떠안고 매일 1000미터 달리기를 한 다는 것은 운동이 아니라 고문에 가까웠다. 설립자는 학교 운영의 크고 작은 모든 분야에서 매번 본인이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를 하고 시시콜콜 개입을 했다. 이는 마치 고대 중국의 진시황을 방불케 했다. 본인의 뜻하는 대로 학교가 움직이는 걸 볼 때마다 엄청난 희열과 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보였다.
설립자의 무지와 몽매 아니면 어쭙잖은 소신으로 10대 초반의 어린 학생들에게 ‘사람 잡는 퍼포먼스’가 자행된 것이었다. 땅콩밭 수준 모래 발 운동장에서 1,000 달리기를 완주하고 나면 숨이 차고 땀은 줄줄 흘러내리고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뒤를 잇는 오후 2시간 수업이란 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일부 운동을 좋아하거나 달음박질에 타고난 재능을 가진 친구들에겐 이 프로그램이 우호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까지 부인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게 정말 사실이 아니길 바랬다. 애시당초 운동과는 거리가 멀고 친하지 않으며 젬병인, 더구나 달음박질엔 도저히 견적이 나오지 않는 특정인 나를 지목하여 골탕을 먹이려는 것이 설립자의 음모라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그렇게 운동에 큰 뜻이 있다면 타고난 소질이 있고 역량이 있는 학생을 조기에 발굴하여 ‘육상부’라는 이름을 빌어 국가대표급 선수를 육성하는 방안을 모색하면 될 것이었다. 한여름 뙈약볕의 무더위 아래 어린 학생들을 땅콩밭 수준 모래운동장으로 내모는 것은 건전한 국민 일반상식에 비추어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지금이라면 감독기관이나 국가권익를 통한 진정 등으로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었다.
설립자는 정규수업 시간 등을 빌어 같은 또래 대비 3~4 넌 정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육상 도 대표 선수의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이어갔다. 이 선수는 자신의 집에 같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끔 잠자는 그 선수의 종아리를 점검해보면 아주 탄탄하게 탄력이 있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 대목에선 저분의 정신능력의 일정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본관 건물 메인ㆍ로열 존엔 ‘체력은 국력이다’란 슬로건이 장악하고 있는 시대였으니 무엇을 탓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