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맥주와 88 스텔라 택시(2편)

by 그루터기


“이러다 바퀴가 차체에서 떨어져 제멋대로 굴러갈 것 같은데?” 친구 상수가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아저씨 이쪽을 붙으셔야지요? 중앙선 쪽으로 너무 쏠렸네요.”

“제가 다 알아서 갑니다. 불시에 어린아이들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5분 일찍 가려다 50년 일찍 도착할 수 있어요”

이 드라이버는 운전에 관한 한 자신이 많은 경험과 관록이 있다고 자신했다. 게다가 나름 자신만의 원칙을 고집했다.

“6,100원입니다.”

“거스름은 됐습니다.”

“아이 이 것 고마워서 어떡하지?”

전원주택의 주인장인 민우는 오늘 택시요금을 치를 때 좀 무리를 했다, 드라이버는 이런 친구의 손을 악수하듯이 한번 더 잡으며 감사의 인사를 연신 퍼부었다.

이윽고 우리가 들어선 주점은 오픈한 지 많은 세월이 지나지 않아 보였다. 민트색 톤으로 인테리어를 꾸몄다. 주점을 들어서자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남정네 대여섯 명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미크론 정국에도 영업이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것으로 보였다. 제법 인지도가 있는 치킨 브랜드였다. 이곳 학산면은 우리보다 면단위 인구가 850여 명(60%)이나 많았다. 이런 우위가 여러 곳에서 차이를 가져왔다. 음식점이나 주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업종도 다양했다.

이 주점에선 배경음악으로 7080 세대 가요나 올드 팝송을 깔아 주었다. 오래전 시골 다방 음악의 대세였던 유선 방송 음악보다는 진일보 했다. 그렇다고 카세트 레코더에 장착한 음악 테이프이나 둥그런 디스크에 담긴 음악은 아니었다. 미리 USB에 담긴 음악을 계속해서 반복 재생해주는 듯했다.

20대 초중반에 내가 즐겨 듣던 음악도 적지 않았다. 영국의 4인조 그룹 스모키의 ‘Living Next Door to Alis’와 당시 16세 독일 여성 니콜레 플리그의 ‘A little peace’ 등 귀에 익은 음악 때문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스모키의 노래는 내가 대학 1년 2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막 겨울방학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캠퍼스 타운 삼거리 한편에 자리한 ‘이브 음악사’에서 흘러나왔다. 이웃집 여성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온 남성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았다. 이에 반해 니콜레 프리그의 노래는 중앙도서관 법대생 전용 도서관 안의 내 지정석에서 들을 수 있었다. ‘대학의 소리(vou)’ 오후 방송 마감 무렵에 단골로 등장하던 노래 중의 하나였다. 평화란 사랑과 인내라고 노래하는 해맑은 모습을 갖춘 소녀였다. 그 순수함과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곡이었다.

우리 일행 셋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에 500 cc 생맥주잔 10여 개를 비워냈다. 20대 초반 생맥주 기준으로 자신의 주량이 5,000 cc 아니면 10,000 cc라며 무용담을 늘어놓던 시절에 비하면 이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이번 오미크론 탓에 이곳 고향집에서 자가 격리를 마친 성수와는 오랜만에 마주 앉은 술자리였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대로 몇 주간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로 했단다. 친구는 거주지가 세종시였다. 이러다 보니 코로나 정국 이전에 1박 2일 코스의 고향 동창 정기 모임 이외엔 서로 얼굴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나보다 성수가 상대적으로 더 자주 만났던 다른 친구들의 안부와 근황도 전해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메인 안주로 식탁에 오른 치킨도 그런대로 가성비가 좋았다. 신성한 작은 노동 후의 뒤풀이였다. 게다가 20대 초중반의 소중한 추억을 불러 낼 수 있는 즐거운 생맥주 나들이였다.

이제 자리를 파하고 일어서기로 했다. 그런데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복귀하는 교통편이 또 문제였다. 군내 지역을 오가는 시외버스가 끊긴 시각이었다. 지방도를 오가는 택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으로 나설 때 이용했던 드라이버의 연락처를 들추었다. 그러던 중 이 주점에서도 택시를 호출해주겠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찾던 택시와 주점에서 연락을 한 차량 드라이버는 같은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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