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챙이, 이리 와서 막걸이 한 잔 하고 좀 쉬었다 하세! ”
“우챙이, 이쪽에 좀 더 칠해야겠는데...”
아버지는 창고집 벽에 흙손으로 미장 일을 하던 친척 아저씨에게 새참을 권유했다
막내 동생이 처음으로 세상을 구경하던 해였다. 나는 만 5세였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한 해 전이었다. 아버지의 생업은 양곡상이었다. 쌀, 보리쌀 소매업이 메인이었다. 게다가 소금, 밀가루, 시멘트도 취급했다.
아버지가 친척 아저씨를 부르는 것을 나는 의미도 모르는 채 그대로 따라 불렀다. 창고집 공사에 모여든 친인척이나 친지들은 순간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이것이 무척이나 재미 있었다. 게다가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초등학교 문턱도 아직 넘어서지 못한 5살박이 꼬마가 친척 아저씨의 이름을 그저 아무 거리낌없이 함부로 불러댄 것이었다. 어리고 철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것을 접어주고 용서받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양곡상을 꾸려 가는데 꼭 필요한 영업장소 겸 물류센터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래서 창고집을 새로이 짓기로 결단을 내렸다. 대지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인천 이씨 종중터에 건물을 짓기로 한 것이었다. 어려운 용어인 ‘지상권’을 확보한 창고집 공사를 강행했다.
가곡리 300번지 본가와 달리 이곳은 거주가 주된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양곡상이라는 생업을 이어가는데 꼭 필요한 건축물이었다. 그럼에도 한 쪽 켠에 제법 너른 크기의 단칸방도 마련했다. 이 창고집은 300번지 거주지와 달리 요즈음 용어를 빌자면 ‘세컨드 하우스“라 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약 35년이란 긴 세월동안 아버지의 영업장이자 물류센터 역할을 충분해 해냈다. 그 이후 부모님 말년에는 두 분이 해로한 곳이었다. 지금 내가 귀촌하여 기거 중인 단층 슬라브 양옥집으로 옮겨오기 전엔 우리 가족 모두의 오랜 추억과 애환이 깃든 또 하나의 둥지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은 300번지 본가를 떠나 관내 메인스트리트로 진입했다. 이곳에선 두 누나가 연이어 오랜 기간 신발과 담배 등을 주로 취급하는 가게를 꾸려갔다. 300번지 보다는 창고집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아버지는 양곡상이란 생업에 매진했다. 하지만 이곳 창고집에 머무르는 시간은 하루 중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300번지 시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버지는 창고집으로 우선 나서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 후 아버지는 대외 활동을 활발히 이어갔다.
별로 고급스러운 목재를 동원하지는 않았다. 8짝이나 되는 목재문으로 설계되었다. 이 목재 문의 아래와 위 부분에 홈을 마련했다. 이를 홈에 맞추어 옆으로 끼워 넣어 잠궜다 열었다 하는 방식이었다. 최근 잠금 장치를 매단 1번 문에는 성인 남자 한명이 허리를 최대한 오그려야 드나들 수 있는 ’쪽문‘을 오른쪽 하단에 장착했다. 1번 문의 1/3 수준 높이까지 직사각형 부분을 여닫는 독특한 구조였다. 육중한 경첩에 U.S.A.라는 문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자물통의 시건 장치를 자랑스럽게 매달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나보다 덜 시달렸어. 나는 허구헌 날 창고집을 혼자 지키느라 아주 애를 먹었어.”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형의 회고담이었다.
300번지 본가, 그 이후 메인스트리트 대로변의 가게 시절엔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우리 6남매는 이 창고집을 수없이 오갔다. 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쳤다. 일단 수업이 파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첫 수순이었다. 아버지의 양곡상 일이나 나중에 발을 들여 놓은 안삼 사업 관련 작업이 주로 이 창고집에서 이루어졌다.
양곡상 시절의 아버지는 관내 또는 읍내 출장이 매우 잦았다. 8인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여러 곳을 찾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다 보니 방과 후에 이 창고집을 지키는 일은 형과 나, 우리 두 형제의 온전한 몫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 창고집에서 자리를 빌 경우 양곡상 일 중 손쉬운 것은 어린 우리 형제가 일정 부분 대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