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력가와 영업의 달인

영업맨의 숙명

by 그루터기

“저, 이렇게 해서 비 고돌이 했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어? 여기는 그런 것 없어요.”

“그럼 팔 싸리도 없겠네요?”

“당연한 것을….”


영업을 마감한 후 나는 점장을 따라나섰다. 오늘

신 회장 저녁 식사 접대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주인공인 신 회장, 우리 점장, 안심저축은행 우 사장, 나 이렇게 모두 4명이 자리했다. 무영쌈밥집으로 이미 식당 예약을 마쳤다. 이 집의 메인 메뉴인 차돌박이 쌈밥에 나는 갑자기 푹 빠졌다. 이 음식이 입맛에 딱이었다. 차돌박이는 삼겹살에 비해 두께나 부피가 훨씬 부담이 없었다. 그야말로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식감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맛있는 저녁상을 물리고 드디어 국민 오락인 고스톱판이 벌어졌다. 제도권 금융권에 묻어둔 자산 규모만도 1,000억은 족히 되어 보이는 신 회장이었다. 이러니 금융기관이란 이름을 단 곳마다 신 회장은 섭외 대상으로 단연 영 순위임은 물론이다. 오늘은 투자기관인 우리 회사와 안심저축은행이 연합하여 신 회장을 접대하기로 했다. 양쪽 금융기관 모두에서 신 회장의 거래 규모는 단연 탑이었다.


고스톱의 규칙은 지역, 집단, 장소마다 모두 달랐다. 참여자가 합의하기 나름이었다. 우리 회사 직원 간에 통용되는 고스톱 규칙 대비 오늘 열린 경기의 그것은 확연히 달랐다. 아주 기본적인 ‘약’ 말고는 다른 것을 거의 구경할 수 없었다. ‘민화투’에 가까웠다. 우리 회사의 고스톱 규칙에 이미 익숙해진 나에겐 밋밋하거나 무미건조한 경기였다. 변수가 많지 않았고 반전의 기회가 적었다. 변동성이 매우 작은 주식 종목을 방불케 했다. 그러니 다이내믹한 경기가 연출되기를 기대하기란 무리였다.


엄청난 재력가임에도 신 회장은 1,000원 지폐 한 장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몹시 벌벌 떨었다.

‘대단한 재력가인 신 회장이 멤버로 참여하는 고스톱 경기 규칙이 이렇게 심플하다니….’

참으로 의외였다. 나는 잠시 반성 모드에 돌입했다.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우리 직원들은 ‘허풍’만 잔뜩 든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오늘 이 접대 자리의 주인공은 단연히 신 회장이었다.

갑자기 내가 20대에 막 접어들던 시절이 떠올랐다. 고향 절친으로부터 ‘영업 고스톱’이란 말을 처음 접했다. 하우스 출신 선수들만 등장하는 ‘메이저리그’나 친구나 직장 동료들과 즐기는 ‘친선리그’와 구분되는 의미였다. 내가 보기엔 이 ‘영업 리거’란 것이 ‘메이저리거’나 ‘친선 리거’보다 훨씬 데뷔하기에 지난한 자리로 보였다.

영업 리거로선 여러 가지 능력과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접대받는 그날 주인공의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게 플레이를 이어가야 했다.


주인공의 상대로 나선 선수는 자신의 체력과 실력 등 개인기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를 마음껏 발휘하는 것을 자제해야 했다. 주인공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 임무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일부러 판돈을 잃어주려고 나섰다는 인상도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었다.

이 양쪽 끄트머리 지점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끝까지 깨지 않기 위해서 긴장을 이어가야 했다. 이에 실패하면 접대 경기를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이렇게 완급을 조절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고스톱 실력은 기본적으로 최상급에 랭크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흔히 이르는 ‘밀고 당기기’의 고수에 데뷔를 할 수 있다. 일부러 승부를 조작한다는 낌새를 절대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조

심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 점포 박 점장은 이번 경기에서 완급조절에 성공하지 못했다. 무릇 고스톱 경기란 ‘운칠기삼’이라고 한다. 뒤의 패가 우선 잘 맞아야 하고 양옆의 선수를 모두 잘 만나야 승률은 물론 수익률이 높아진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박 점장은 승률은 물론 수익률에서 발군

이었다. 평소 자신의 실력 이상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앞으로 집합한 판돈을 일부러라도 다른 선수에게 내보내야 했으나 그 프로그램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했다.


이런 박 점장과 달리 우 사장은 정말 노련했다. 이른바 ‘밀고 당기기’ 기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것도 오늘의 주인공인 신 회장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완벽한 플레이를 구사했다.


게다가 이른바 ‘언론플레이’에도 능했다. 매 세트

마다 게임 내용을 실시간으로 중계방송했고 해설

을 이어갔다. 또한 상대방의 개별 플레이에 대한 평가인 이른바 추임새와 질책도 아주 적절하게 섞어냈다. 신 회장의 웃음과 탄식 소리가 수시로 교차했다.


우 사장은 뛰어난 고스톱 실력은 기본이었다. 대

단한 ‘입담 실력’을 유감없이 자랑했다. 우 사장

은 신 회장을 울렸다, 웃겼다 했고 경기 시종 모

든 선수를 마음대로 ‘들었다 놓았다’ 하는 신기

를 선보였다.


같은 게임에 플레이어로 참여한 나는 소름이 돋았다. 오늘은 진정한 ‘영업의 달인’을 만난 수지맞은 날이었다.


“우리 팽 과장의 동양화 감상 실력은 이 정도면 합격점이지 않나요?”

“그다음은 피리 소리를 들어보아야 하지요?”

여기서 ‘피리 소리’란 노력 실력을 이름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2차 접대인 노래방 순례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태어난 이래 줄곧 소리를 다스리는 내가 결국 형편없는 수준의 피리 소리를 신 회장과 우 사장에게 선보이는 어색한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아니, 신 회장님! 저를 무시하는 겁니까?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면 저에게 당연히 먼저 알렸어야지

요! 생신을 축하드릴 기회를 왜 주지 않았어요?”

신 회장은 자신의 생일을 맞았다. 그래서 설악산 자락의 가장 전망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은 별장

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이런 사태의 전모를 알아차린 우 사장이었다. 그래서 밸런타인 21년 산’ 한 병을 자신의 한 손에 불끈 쥐어 들고 한걸음에 별장에 칩거 중인 신 회장을 찾아 나섰다.


어찌 보면 적반하장이었다. 신 회장에게 생일날 자신을 초대하지 않은 이유를 대라고 우 사장은 되레 큰소리를 치며 혼쭐을 냈다. 신 회장은 자신이 이렇게 우 사장으로부터 크게 혼이 날 정도로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는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래서 우 사장은 지난번 저녁 식사 후 고스톱 경기에 이어 오늘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의 영업력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사실 신 회장으로선 자신이 갖지 못한 능력이나 재주를 겸비한 우 사장에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상호 은행에 근무 중인 최 과장이 최근 내게 이른 귀띔이었다.


“상무님,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증권회사 영

업책임자가 왔다 칩시다. 아주 경쟁력 있는 상품

을 손에 들고 상무님을 찾았어요. 그럼 즉시 자금

을 넣어주시나요?”

“에이, 아니지요. 팽 과장님도 잘 아시면서, 저한

테 그걸 물어요?”


우리의 단골 거래처인 신흥새마을금고 방 상무

는 자신을 처음 찾는 증권회사 영업책임자가 눈

에 번쩍 뜨이는 상품을 들이밀었더라도 금세 거

래 개시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객은 영업

책임자의 진정성, 영업활동의 일관성, 패턴 등을

꼼꼼히 따져 보고야 거래 개시 여부를 판단한다

는 것이었다.


사실 상품의 내용이나 경쟁력만이 금융소비자의

유일한 선택 기준은 아니다. 이는 이미 널리 알려

진 사실이다. 꾸준히 온·오프라인상 다양한 소통

이력을 쌓고 소비자의 신뢰를 끌어내는 것이 우

선이다. 상품의 다른 부수적인 내용이나 거래 조

건은 거래 개시의 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

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녁 식사 후 고스톱 접대나 신 회장의 생일

날 설악산 별장까지 신 회장을 찾아 나선 우 사장

의 영업력에 경의를 표했다. 우 사장의 VVIP 고

객에 대한 응대 노하우에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향후에도 이 대단

한 재력가인 신 회장은 영업의 달인인 우 사장의

내공이 쌓인 능수능란한 테크닉은 물론 두뇌와

몸놀림에 번번이 굴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저렇게 손바닥 위의 손금이 깔끔하게 일직선인

경우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주 비렁뱅이가 되거

나 아니면 사업을 해서 크게 성공하거나 하지요.

그래서 신 회장과 복 사장은 필드에 나가면 둘이

서 수시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요란을 떱니다.”

얼마 전 우 사장이 나와 점장에게 던진 한마디였

다.





작가의 이전글사이코패스 점장과 똠방 각하(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