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뾰루찌입니다.좀 아플 텐데 참으세요.” 언제부터인지 몰랐다. 내 엉덩이 꼬리뼈에서 위쪽으로 약 10여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종기가 생겨났다. 완전히 곪긴까진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약간의 통증이 수반되었다. 게다가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할 때마다 거추장스러웠다.
나도 이제 거의 모든 부문에서 고위험군의 범주에 들어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몸에 조그마한 이상이 생겨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이야 그까지 것 종기야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그래서 읍내 @@외과의원을 찾아 나섰다.혹시나 ‘좋지 않은 것’ 일 수도 있다는 약간의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읍내엔 외과가 여기 한 곳뿐이지요? 예전 저희 아버님이 다니시던 곳인데...”
나는 원장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가기 위해 한 마디 던졌다.
이곳 원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준비된 수술용 칼을 들이대었다. 문제의 부위를 단번에 절개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염증의 뿌리를 인정사정없이 들어내는 시술을 순식간에 마쳤다. 마취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 친구들로부터 ‘소나무 뿌리’니 ‘뚝곰’으로 불리는 놀림을 받았다. 참을성과 끈기가 남들보다 많다는 의미로 들렸다. 칭찬 반 놀림 반으로 내게 붙여진 별칭이었다. 이렇게 웬만한 통증을 잘도 참아내는 나였지만 방금 전 이 원장의 처치엔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였다. 마취를 하지 않고 이른바 생살을 짼 것이었다.이럼에도 마취를 동반하지 않는 치료가 비교적 더 일찍 잘 아문다는 속설에 위로받고 싶었다.이윽고 엉덩이 주사를 맞고 처방전을 들고선 바로 길 건너 맞은편에 자리한 약국에 들렀다. 그런 다음 바로 귀가 길에 올랐다.
“아직 더 나오셔야 합니다. 해당 부위가 꾸들 꾸들 해져야 하는데...”
세 번째 방문 시 간호사의 언급이 있었다. 때론 원장의 오더에 따라 간호사가 기계적으로 소독과 근육주사 처치 등을 이어가기만 했다.
“이제 다음 주 초에 나오면 될까요?”
“아닙니다. 휴일이 끼어 있어 내일도 소독을 하고 처치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곳은 토요일도 진료를 이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내가 이곳에 네 번째 들르는 날이었다. 첫날 시술을 받은 후 3번 모두는 문제의 처치 부위 소독과 엉덩이주사. 내복약처방 등 똑같은 코스를 반복해서 경험해야 했다.
이쯤에서 나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은 증상에 과잉대처 내지 진료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예감이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최근 6개월간의 실업급여 혜택을 받아 아주 알차고 달콤한 휴가를고향에서 즐긴 후 이제 곧 다시 수도권으로 복귀를 하려던 참이었다.
읍내를 오가며 이곳 외과 병원을 알게 된 것도 어언 30여 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읍내에선 보기 드문 4층 단독빌딩이었고 외벽 군데군데 생긴
균열과 흰색 도료가 색이 바랜 것만 보아도 오래된 건물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원장은 이곳에서 적어도 40여 년간 영업을 이어가고 있는 지역 터줏대감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단골 환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뾰루지 치료를 받기 위해 처음 들어설 때부터 이곳은 독특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었다. 항상 10여 명 내외의 연로한 지역 거주 노인 환자들이 진료실 앞에 대기 중이었다.젊거나 청소년 내지 어린 학생들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적어도 60대 이상의 고령층이 단골 환자들이었다. 얼마 전 우리 고향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절친이 나를 농담으로 부르던 ‘독거노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이 항상 이른바 단골 환자로 북적이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읍내 유일한 외과의원이라는 독점적 지위에다 원장의 처방, 지시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시골 고령층 환자의 성향이 이른바 상승작용을 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다 보니 이 원장의 교묘한 과잉 진료행위에 관해 이를 따지거나 탓하는 이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내 짐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