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제법 흘렀다. 어느덧 나는 금융기관 초임 책임자인 대리로 서울의 강서지역 한 점포의 법인영업팀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투자신탁이 제일 먼저 달력을 가져오셨네요.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새마을금고 여직원은 반색을 하며 우리를 맞이했다. 은행 등 타 금융기관 달력과 달리 꽃사진으로 특화된 3대 투지신탁회사 달력은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 오늘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화질이니 꽃사진의 등급을 따져볼 때 우리 회사의 달력은 그중 단연 최고로 꼽혔다. 게다가 오늘은 액자달력 한 부를 추가로 모시고 왔으니 찬사를 받을 만도 했다.
품질이나 등급이 같은 물건이라도 이렇게 한 박자 이르게 금융기관 중 제일 먼저 배포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었고 그 홍보효과는 배가되었다. 당시로선 우리 지점과 거래 규모가 100억대를 넘어서더라도 이 액자달력을 3부 이상 배정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달력 제작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직사각형의 나무틀을 제외한 ‘내지’만을 따로 추가 제작하여 기존 배포 거레처엔 이 내지만을 매년 갈아끼우는 방식을 채택했다. 우리 회사의 이 액자달력의 액자틀의 재질이나 디잔인도 뛰어나다 보니 내용물을 다른 회사의 것으로 교체하는 얌체 같은 배신 행위도 가끔 눈에 들어왔다. 해마다 내지가 아니라 온전한 액자달력을 추가로 배정해 달라는 요청이 여러 곳에서 쇄도했다. 법인고객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자택에 걸 용도로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액자 달력 수량이 몇 개 모자라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독식자 숙소에 이게 무슨 필요가 있어, 고객에게 배포하기에도 부족한데?”
판촉 담당 차장은 이 액자달력의 재고를 수시로 파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오늘도 판촉담당 차장의 호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지난번 서무대리가 호기롭게 독신자숙소에 추가로 배정한 한 개의 이 물량을 자진 신고하고 지점에 반납해야 했다.
5일 근무제를 우리 회사는 초중고교 보다 먼저 도입했다. 학교에 적을 두고 있는 집사람은 오늘도 출근을 해야 했다. 오늘은 둘째 아들을 어린이집에 내가 데려다주는 토요일이었다. 최근에 우리 영업점에 도착한 벽걸이와 데스크형 달력을 넉넉하게 준비하여 내 애마 트렁크에 담아두고 영업을 하던 중이었다.
“아버님, 지난번 저희들이 받은 달력의 꽃사진이 너무나 예쁘고 고급스러웠어요. 정말 고와웠구요.너무나 값지다 보니 저희 어린이집에서 아이들 교보재로 쓸까 생각도 해보았답니다.”
또 한 번 나는 신입사원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한겨울에 액자달력을 배포하러 찾아 나섰던 우리 남사원들이 겪었던 병원 측의 푸대접을 이후엔 다시 겪을 일이 없어졌다. 이 달력을 가져다주는 곳마다 대환영에 극찬이 더해졌다.
우리 회사는 그간 주인이 없는 회사에서 굴지의 은행 계열사로 금융그룹에 편입이 완료되었다. 우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영업점의 자체식당을 없애는 등 여러 부문에서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런 여러 가지 변화 중 달력 부문에도 그것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3대 투신사의 꽃사진 달력은 역사 속으로 점차 사라지는 수순을 밟아나가고 있었다.
우리도 은행의 달력에 맞추어 허접한 동양화 사진이 고급진 꽃사진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회사명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꽃사진 달력의 제작을 계속 이어갈 것을 건의했던 담당부서의 건의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이른바 점령군 대리인을 자처하는 새로운 경영진은 이 건의를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 중의 하나였다.
이래서 계속해서 영업점을 찾는 고객들은 은행 버전으로 탈바꿈한 벽걸이용은 물론 데스크 달력에도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점차 벽걸이용은 그 자취를 감추었고 그나마 데스크형을 찾는 이들이 대세가 된 시절이었음에도 그랬다.
“준수야, 너희 회사는 이젠 아예 달력을 만들지 않나 보네?”
발로 뛰는 영업을 힘들게 이어가던 나였다. 내 애마의 트렁크에 잔뜩 담긴 고급진 꼿사진이 장착된 달력을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에 차곡차곡 챙겨 넣던 고향 여자동기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내게 묻던 목소리가 아련했다.
“투자신탁 회사는 판촉물 하나를 만들어도 이렇게 예쁘고 고급진데...?”
신입사원 시절 최근 본부에서 일괄제작하여 영업점에 배포한 손톱깎이 세트 하나를 내게서 받아 든 거래은행 여직원의 찬사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했다. 그러니 이 고급진 액자형 달력이야 일러 무엇했겠는가.
허접한 동양화 달력과 고급진 꽃사진 달력 제작비 사이엔 아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었다. 금융그룹 차원에서 PI를 통일해야 한다는 명분이 무엇보다 앞선 것으로 보였다. 이참에 아예 그룹 계열사 전체 달력을 허접한 동양화가 실린 것에서 고급진 꽃사진을 담은 달력으로 바꾸어버리기로 결단을 내리는 발상의 대전환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