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번 더 와야겠네요, 닭볶음탕을 먹으려면”
우리 회사 거래은행 직원 박주임은 나와 직장생활 입사동기였다. 나와 박주임은 각각 D투자신탁과 S은행으로 소속은 달랐지만 입사동기인 셈이었다. 같은 해에 밥벌이에 나섰으니 이렇게 불러도 큰 무리가 아니었다.
박주임은 최근 은행 지점 내 업무분장에서 출납업무에 명을 받았다. 그래서 영업마감시각이 다가오면 청경 한 명을 대동하고 우리 지점 출납박스 앞으로 어김없이 나타났다. 검은색 007 현송용 가방을 챙기어 우리 지점을 매일 들락거렸다. 경영학을 전공한 박주임은 상고출신 초급행원과 달리 중견행원이라 불렸다. 하지만 박주임은 당시 유용한 계산수단인 주판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했다. 이에 우리 지점을 오가던 초기엔 자기 앞수표 횡선인 날인과 수표집계에 숙달된 초급 남자 행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박주임과 나는 농촌출신에다 같은 금융인이란 점에서 우선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박주임의 그 특유의 수더분한 성격과 친화력 덕분에 우리 둘 사이는 단순한 거래처 직원을 넘어 어느덧 고향친구에 버금가는 관계로 발전했다. 박주임은 수원에서 제법 거리가 먼 고향 화성에서 수원 남문에 자리한 지점까지 출퇴근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가운전 승용차는 언감생심이었다.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시외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겨우 일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출퇴근엔 거의 1시간 반이나 필요했다.
그간 나는 안양의 형집에 얹혀사는 신세를 겨우 면했다. 연고지가 아닌 곳에서 근무 중인 직원을 위해 회사 측에선 거점도시마다 이른바 ‘독신자숙소’라 이름한 아파트를 전세로 마련해 주는 것이 당시 대세였다.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주식과 부식비는 입주직원들이 각각 나누어서 분담했다. 취사, 세탁, 청소 등은 회사 측에서 일용직으로 고용한 지긋한 연세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모두 해결해 주었다.
박주임과 나는 그간 몇 차례 술자리를 주고받았다. 자신의 대학 전공이 경영학임에도 불구하고 법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고 할 정도로 법학지식으로 제법 무장되어 있었다. 농촌 출신, 수더분한 성격, 법학에 관한 상당한 지식 등이 연결고리가 되어 우리는 이미 절친 술친구의 반열에 올랐다.
오늘도 2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이번엔 내가 박주임에게 우리 독신자 숙소행을 전격 제안했고 박주임은 주저 없이 이에 뜻을 같이 했다. 지금 이 시각에 자신의 보금자리인 화성으로 퇴근 후 내일 이른 시각에 출근길에 오른다는 것도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출입문을 들어서기 전에 꼭 한 곳을 들려야 한다며 박주임은 내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아파트 단지 내 상가의 슈퍼마켓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맥주의 다른 이름으로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던 ‘슈퍼드라이’를 찾았다. 그 브랜명도 세련된 4홉들이 병맥주를 무려 10병이나 검은 비닐봉지 2개에 나누어 담았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직육면체의 깔끔한 얼음 덩어리를 근육질의 젊은 남성모델이 양손으로 각각 ‘기역자’와 ‘니은자’로 껴안은 영상이 TV 화면에 자주 노출되었고 주점이나 슈퍼마켓 벽마다 이 포스터가 자리를 차지했다. 기존 맥주보다 숙성도가 훨씬 높으며 깔끔한 맛을 장담한다는 것이 마케팅의 초점이었다. 유리병의 목부분을 세로길이로 길쭉하게 금박지로 감싼 것도 참신한 이미지 제고에 한몫을 했다. 기존 맥주에 비해 판매가는 약간 높았다. 이날 이후로 박주임이 우리 회사 독신자숙소를 들어설 때마다 이 슈퍼드라이와 오징어등 마른안주는 기본 지참물이 되고 말았다.
“아니지요, 그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지점은 전체회식을 마친 후 독신자숙소 직원은 지점 근처에서 아파트까지 도보로 이동했다. 우리는 이 귀갓길에 박주임을 우연히 마주쳤다. 이에 오늘도 나는 박주임에게 우리 숙소도 동행할 것을 제안했다. 지점에서 우수영업점 포상금으로 구매한 5만 원권 구두상품권을 서무담당 신입 남직원이 동료직원들에게 배포하던 중이었다. 이 신입직원은 거래은행 박주임을 우리 직원으로 착각하여 상품권을 건네주려던 참이었다. 오늘은 아파트 거주 독신직원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 일부도 술자리를 한번 더 이어가려고 숙소까지 동행했다. 신입직원이 박주임을 우리 회사 직원으로 오인할 만큼 나와 박주임은 이제 자주 만나는 막역한 사이로 발전되었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독신자 아파트 발코니의 한편엔 슈퍼드라이 빈병이 수북이 쌓여갔다. 지난번 우리 숙소 도우미 아주머니는 이 슈퍼드라이 빈병을 알뜰하게 모아 현금화하여 저녁 식탁에 닭볶음탕을 올려주었다. 스몰 회식자리가 마련되었던 것이었다. 이런 일화를 내게서 전해 들은 박주임은 오늘도 발코니에 쌓인 슈퍼드라이 빈병 숫자를 어림하여 헤아리며 한마디를 던진 것이었다.
당시는 휴대폰이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다. 박주임과 나는 서로 회사의 전화번호를 통하여 소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지점 내 재형저축팀의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에 아파트 거주 다른 동료직원 두 명은 모두 다른 선약으로 숙소에 늦게서야 도착했다. 내가 먼저 숙소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오늘도 검은 비닐봉지 2개에 나누어 담긴 슈퍼드라이 10병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방금 전 거래은행 박주임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확실한 물증이었다. 박주임은 오늘도 우리 숙소 직원들과 술자리를 같이하고 싶었으나 우리 모두의 늦은 귀가로 슈퍼드라이만이 그 자리를 야무지게 지키고 있었다.
“부장님 인맥이 장난이 아닙니다. 아직도 그 오래전 거래은행 박주임과 소통하는가 봅니다.” 신입사원 시절 같은 점포에서 근무한 인연이 있는 여직원의 일갈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시 빈병값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계산해 주었지요. 우리 나이에 이젠 가족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혼자서 지내면 아니 되옵니다. “
오늘 늦은 저녁 시간에 박주임과 나는 안부 전화를 주고받았다. 사람의 인연이란 매우 소중하고 질긴 것임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