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by Tigerwood

11. 오후 3시 30분

새끼손가락에 묶인 하얀 실은 명징하게 존재했다. 손가락의 살갗 아래 피가 흐르듯, 실에서 맥박처럼 쿵쿵거리는 떨림이 느껴졌다. 실을 풀려고 애쓰면 손가락만 아릴 뿐이었고, 자르려고 해도 가위 날은 실체를 통과하며 허무하게 헛돌았다.

이때 모니터 하단의 디지털시계는 정확히 ‘오후 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박 대리, 이 실 좀 잘라주게.”

“네? 어떤 실이요?”

나는 실이 잘 보이게 새끼손가락을 들었으나, 박 대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내 손가락과 눈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뭐지? 실이 안 보이는 건가?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마치 나만 보는 허상처럼.’

코를 중심으로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박 대리의 드러난 짜증을 보면서, 내가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을 새로 발견하고 학습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생경한 현실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 마치 다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 같았다.

‘피는 통한다. 하지만, 이 떨림. 실이 맥박처럼 쿵쿵거리는 이 느낌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모든 혼란의 원인이 이 실로부터인가? 젠장, 이젠 뭐가 현실이고 망상인지 모르겠다.’

나는 체념하듯 모니터 속 빈 표를 물끄러미 보았다. 5시 보고를 위해 당장 서류를 작성해야 하는데, 정신은 딴 세상에 가 있었다. 더구나 표의 칸들은 수평과 수직을 잃은 채 이리저리 뒤섞여 눈을 마구 어지럽혔다.

‘이러면 안 된다. 정신을 붙잡아야 해.’

찬물에 적신 손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조금 전까지 몸을 지배하던 이상한 열기가 급격하게 식어 내려갔다. 열기가 줄어들면서 등골을 타고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꺼림칙함이 온몸을 잠식했다. 그 지독한 소름이 완전히 걷힐 때까지,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12. 오후 4시 24분

‘오후 4시 24분’

텅 빈 모니터 속에,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가로줄과 세로줄이 만나 만들어낸 표의 칸이 각각의 영역이 되고 땅이 된 듯, 그 안으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몽롱한 기분에 빠져 들었다. 어지러움으로 말랑말랑해진 뇌가 어질, 어질 하던 바로 그때였다.

‘No.’ 칸이 한 번 번쩍이더니, 옆 칸에 ‘제목’과 ‘국가’란 글자가 나타났다.

‘어, 뭐지?’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찰나, 아래 칸에 숫자 ‘1’이 나타났다. 그 옆 칸에는 뜨겁게 달궈진 인두에 눌리듯 검은 글자가 새겨졌다.

<1. 돌장승과 세 호랑이, 고구려>

‘이 제목은, 이번에 올리려던 이야기다! 맞아. 이게 첫 번째 이야기였지. 첫 번째…’

머릿속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벌써 아래 칸에 ‘No, 제목, 국가명’에 맞춰 칸들이 채워지고 있었다.

<2. 멧지네와 두꺼비>, <3. 용을 먹은 지네용>

‘멧지네와 두꺼비? 용을 먹은 지네용이라고?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생소한 느낌이기도 하고…’

뒤이어 주르륵 나타나는 글을 따라가며 제목을 읽어 보았으나 더 낯설기만 했다. ‘듣긴 한 제목들인 건가?’


‘내 복잡한 사념과는 상관없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키보드를 신나게 두드리는 것 같다. 기억의 실마리를 더듬어 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글자는 쉼 없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가기 벅차다는 생각이 가슴에 꽂히자, 도깨비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마음이 급작스럽게 편안해졌다.

“맞아! 이 제목들!”

<12. 뱃사공 처녀와 까마귀>를 보는 순간, 비로소 알았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외친 줄도 모를 만큼 들뜬상태였다.

“연대기 순이었지! 연대기!”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고구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무렵까지 12개의 이야기. 비로소 위의 제목들이 눈에 익었다.

‘까마귀 왕이, 나를 돕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속 귀신 할머니가 도와주고 있는 걸까? 이 기묘한 실과 이 기록은 분명 연관되어 있다.’


<13. 생각 주머니>, <14. 새끼손가락 도령>, <15. 화 여인>

백제의 세 이야기 제목이 나온 후, 화면의 커서가 제자리에서 깜빡거리며 숨을 골랐다.

주로 백제 수도에서 사람 속에 숨어 살던 인족 도깨비!

이 도깨비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나는 유독 싫어했다. 생각만 해도 뒷덜미에 소름이 돋고 기분이 꺼림칙해졌다. 거대한 덩치의 고구려 큰족 도깨비와는 결이 다른, 비열하고 습한 공포였다. 기억은 휘발되었을지언정, 그 시절 겪었던 악몽의 잔해는 내 창자에 고스란히 들러붙어 있는 모양이다. 지금도 지네 한 마리가 창벽을 긁으며 거슬러 올라오는 듯한 불쾌한 통증이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까.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으나, 이제는 알 것 같다. 인족 도깨비는 현대의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비유하면 정확할 것이다. 공감 능력이라곤 완벽히 거세된 채, 사람의 탈을 쓰고 타인의 고통을 탐닉하는 괴물들. 그런 존재들이 우리 회사에도 여럿 섞여 있다.

“나 부장, 당장 내 사무실로 오게!”

강 이사는 일주일 내내 틈만 나면 나를 타깃으로 삼아 들볶아댔다. 내가 조 이사의 사람이라는 그만의 비뚤어진 확신이 그의 가학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사내 정치에 발을 들인 적도, 오해를 풀어야 할 비굴한 이유도 내겐 없다. 단지 윗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했을 뿐인데, 그는 그것을 배신이라 규정하고 독을 뿜는다.

강 이사의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이간질의 악취가 진동한다. 그는 내 명예를 갉아먹는 음해를 숨 쉬듯 내뱉는다. 한때는 그에게 진심을 다해 보려 노력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는 타인의 진심을 먹이 삼아 위로 기어오르는 포식자일 뿐이니까. 저 인간 때문에 옥상 난간 끝에서 두 번이나 투신을 고민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지만, 어쩌겠는가.

‘쳇! 나도 까탈스러운 놈이지. 모르는 척 눈 감으면 될 것을….’

저런 인간의 추악한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저주처럼 느껴진다. 왜 남들은 못 보는 걸 나만 읽어내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싫으면 중이 떠나야 마땅하건만, 이 지옥 같은 회사에 목줄이 매여 있는 내가 정말 싫어진다. 젠장, 젠장!


옥상의 그늘진 나만의 보금자리에서 식은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요동치던 속이 진정되었다. 어둡고 축축한 이곳은 버려진 책상과 의자들이 탑처럼 쌓여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다. 낡은 전용 의자에 몸을 묻고 있으면, 간혹 개만큼 커다란 까마귀가 날아와 발치까지 다가오곤 한다. 저런 거대한 까마귀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있다고 하면 누가 믿을 것인가. 후훗, 헛웃음이 났다.

나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다음 이야기들을 곰곰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영산강 유역, 마한의 왕국을 배경으로 하는 도깨비 이야기. 자료를 찾고 무덤과 박물관을 뒤질수록 확신은 짙어졌다.

‘이곳이 동해를 건너 야마토를 세웠던 고대 왕국, 그 뿌리의 땅임이 분명해.’

<16. 이제왜에가나, 삼한>은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들을 따라간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다. 꼬여버린 역사만큼이나 이야기도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 맥락 없는 잔상들만 띄엄띄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큰일이군. 기억이 돌아와도 문제야. 이 방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된 글로 옮길 자신이 없는데.’

“에라, 모르겠다. 그때 가서 고민하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도깨비를 털어내듯 양팔을 뻗어 세게 휘둘렀다.

“부장님, 괜찮으세요.”

놀란 박 대리가 건너편에서 달려왔다. 책상에 엎드려 자다 깬 것인지, 그의 입가에는 허연 침 자국이 번져 있었다.

“어어. 괜찮네. 괜찮아.”

손짓으로 그를 물린 뒤,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써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17. 신솟의 용>, <18. 태와 사>

삼한(三韓)이라 적힌 이야기 속 도깨비들은 큰족이나 인족이 아니었다. 한반도 남부에 터를 잡고 살던, 투박하고 강인한 ‘뿔족 도깨비’. 여기까지가 삼국시대를 가로지르는 세 종족 도깨비의 기나긴 연대기였다.


<21. 볼따구 영감의 대추>

게시판에 처음 올렸던 제목이 화면에 떠올랐다.

‘볼따구 영감… 흐흐….’

입가에 자기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웃음.

뿔 달린 도깨비와 어린아이의 잔상이 뇌리를 스쳤다. 마치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를 관찰자가 되어 지켜보는 듯한 기묘한 기시감이었다. 감정은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고, 이번에는 창자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꾸르륵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억하고 있다고, 잊지 말라고 배 속에서 아우성치는 듯했다.


<34. 용소라 불린 아이>까지 총 서른네 개의 제목들. 연대순으로 정렬된 이 목록을 보자마자, 휘발된 줄 알았던 기억들이 봇물 터지듯 밀려올 것만 같은 전율이 일었다.



13. 오후 5시 55분

“부장님! 부장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찰나, 박 대리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괜찮으세요? 이러다 정말 쓰러지시겠어요.”

“왜 그러나? 박 대리, 무슨 일인가?”

입을 떼자마자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치솟았다. 컥컥거리는 비정상적인 기침 끝에 비릿한 쇠 맛이 혀를 감쌌다.

“부장님! 코피가 납니다.”

당황한 박 대리가 휴지를 찾으러 달려갔다. 액정 정중앙에 튄 선명한 핏방울. 그 핏방울이 액정에 스며드는 착시가 이는 순간, 거짓말처럼 표 안의 글자들이 삭 사라졌다. 코피 자국만 남은 텅 빈 화면.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나를 조롱하는 백지였다.


‘오후 5:55’, 다행히 회의가 내일로 연기되면서 퇴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래도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지친 걸까?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다.’

머리는 징- 하니 울렸고, 어지럼증은 이제 공포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퇴근길. 온몸의 에너지가 구멍으로 빠져나가버린 공허감 때문이었을까. 발을 제대로 딛지 못할 정도로 물컹한 표면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배가 고파서 그럴지도 몰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김이 다 빠진 밥을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뱃속에 밥을 어느 정도 쑤셔 넣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소파에 쓰러지듯 눕자 TV 소리는 멀어지고,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어느새 나는 몸이 옆으로 기운 채 맑고 차가운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가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붉은 하늘에 달 두 개가 떠 있는 넓은 호수.

“안 된다! 모든 이야기를 올려선 안 된다!”

느닷없는 호통 소리에 몸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호수 위에 나타난 TV 화면 속 홈쇼핑 쇼호스트는 물건 대신 내가 보았던 그 표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깨비 왕의 이야기는 절대 안 된다. 기다려라! 기다려야 한다!”

쇼호스트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사무실에서 보았던 그 표가 보였다. 홈쇼핑 물건이 아닌, 표의 제목을 하나씩 가리키면서, 손가락을 가로 젖고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힘도, 시큰거리는 허리를 틀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소파에 뻣뻣이 굳은 채, 아무 꿈도 꾸지 않을 듯한 깊은 잠. 도깨비와 함께 여행하는 신기하면서도 무서운, 아무도 나를 깨울 수 없을 것만 같은 깊디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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