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_장승 바위
날이 기울자마자, 백발 아기씨가 산길의 장승 바위 아래에 홀로 나타났다. 그는 주변을 둘러본 후, 엉덩이까지 길게 땋았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쥐고 당겼다. 백설(白雪) 같던 가짜 머리털이 훌러덩 빠지더니 대머리가 환하게 드러났다.
“크흠, 시원하구나! 이놈의 머리털을 얹고 있자니 땀이 차서 원. 이까짓 것, 괜찮은 술법을 누가 못 만드나? 요즘 애들은 공부라는 걸 모르는구먼… 쯧쯧.”
그는 연신 투덜, 투덜거렸다.
휭! 휭휭―! 빠진 머리채를 잡아 짜증을 거름 삼아 맹렬하게 빙빙 돌렸다.
“빙빙! 돌아라. 돌고 돌아 나를 덮어라!”
“빙빙! 돌고 돌아 나를 꼭꼭 숨겨라!”
“어디 갔니? 어디 갔니? 꼭꼭 숨어라!”
머리채는 순식간에 하늘을 가릴 듯 커다란 보자기로 변하며 넓게 퍼졌다. 보자기로 장승 바위를 덮어씌우자, 백발 아기씨의 형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굳건한 장승 바위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년이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네. 눈깔이 사방으로 돌아가는 본새가 도둑 같았어.”
다음 날 아침, 젊은 마님의 몸종이 영감님의 패물 상자를 훔쳐 도망쳤다는 소문으로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내가 지금까지 모은 패물을 깡그리 훔치다니! 모두 꼴도 보기 싫다. 그년을 잡아 오너라! 그때까지 누구도 오지 말라!”
격노한 영감님은 방에 드러누워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큰딸을 살리기 위한 계획의 하나였다.
해가 질 때쯤, 마님의 사내 하인이 포목점을 정리하는 큰딸을 찾아왔다.
“아기씨, 마님께서 어르신의 건강을 기원하는 공양 상자를 스님께 당장 맡기라 하셨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그리 급한가?”
“보자기로 싸둔 상자라,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내가 다녀오겠네.”
큰딸이 정리를 마치고 손을 털었다.
“워낙 급한 공양품이라 지금 스님께 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큰딸은 이 늦은 밤에 험한 산길을 가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건강을 위한 일이라 마지못해 채비하였다.
“이보게, 아저씨. 나랑 절에 갔다가 와야겠소. 늦었지만 부탁하오.”
큰딸이 포목점에서 일하는 늙은 일꾼에게 난처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아기씨, 이는 중요한 공양품이어서 남의 손에 맞기지 말라 마님께서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제가 아기씨를 모시겠습니다.”
마님의 계획대로, 사내 하인이 큰딸을 이끌고 산사로 향했다.
“아기씨,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사내 하인은 평평하고 편해 보이는 바위를 등불로 비추었다.
“여기가 어디쯤인가?”
“장승 바위가 바로 코앞이니, 산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잠시 앉아 쉬시지요?”
“알겠네. 쉬었다 가세.”
큰딸이 자리에 앉자, 하인은 기다렸다는 듯 그녀 옆에 바짝 붙으며 어깨를 감싸안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큰딸이 기겁하여 뿌리치고 일어서려 하자, 하인은 주저 없이 주먹으로 그녀를 때려 기절시켰다.
얼마 후, 정신이 든 큰딸은 자신이 끔찍하게 유린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내를 밀치고 달아났다. 사방이 칠흑같이 캄캄했지만, 유일하게 희미한 빛을 내는 장승 바위를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어디로 도망가려고? 더 도망가 보던지. 킥킥킥.”
간신히 바위에 도착한 순간, 하인의 손아귀에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더 이상 벗어날 길이 없음을 깨달은 큰딸은 하인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장승 바위 아래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애타게 아버지를 불러보았으나, 구해 줄 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바로 그때, 장승 바위가 땅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어두운 달빛에 비친 바위는 거역할 수 없는 신의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콰르릉! 바위가 큰딸을 뒤따라 커다란 굉음을 내며 낭떠러지로 뛰어내렸다.
그 광경에 얼어버린 사내 하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잔인한 성품으로 영악했던 그는 불쌍한 척 연기할 수는 있었지만, 절대 불쌍해하지 않았고 잔악하게 굴었다. 개미를 보면 남모르게 짓이겼고, 강아지를 보면 배를 걷어찼다. 사람이라고 다를 바 없었으나, 결코 알지 못하게 연기를 했던 그였다. 그런 그도 신의 힘 앞에서는 한낱 부스러지기 쉬운 재일 뿐이었다.
다음 날 새벽, 마님의 사내 하인이 온몸에 피를 흘리며 집 마당에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내 큰딸은 어디 있느냐!”
영감님은 핏발 선 눈으로 다그쳤다.
“어르신, 산길에서 무시무시한 호랑이를 만나… 아기씨께서 그만 장승 바위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영감님은 그 말을 듣고 바로 혼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피를 토하는 듯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집안의 모든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여자는 장승 바위로 가고 남자는 장승 바위 아래로 가거라!”
마님 또한 남편의 서슬 퍼런 광기를 거역하지 못하고 집안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집안사람들은 낭떠러지 밑에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여자 시신을 발견했다.
“딸아,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나를 두고 가 버리면 나는 어떻게 살라는 거냐.”
그는 마당에 놓인 나무관 속 딸을 보며, 해가 사라질 때까지 슬피 울었다. 항상 허허거리던 성격 좋은 영감님이 밤이 되도록 서글퍼 우니, 집안 식구가 모두 눈물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식 잃은 부모만큼 슬픈 사람이 누가 있으리오.
영감님은 혼자 밤을 새우며, 그 누구도 옆에 오지 못하게 했다. 딸의 시신을 지하실로 몰래 옮긴 후, 그 자리에 가지고 다니던 인형을 놓았다. 그러자 조그만 인형이 딸처럼 생긴 피투성이의 시신처럼 변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모두가 보는 앞에서 딸의 장례를 치렀다.
장례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하던 그는 포목점 이층에 머물렀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06_둘째 딸
한 달이 지나고, 영감님은 윷놀이판을 다시 열었다.
“백발 아기씨, 제 큰딸은 무사히 잘 지내는지요?”
“서경의 한 여염집에서 글공부를 즐기고 있으니,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어라. 네가 할 일은 남았다.”
한편, 큰언니를 잃은 슬픔에 둘째 딸은 나날이 시름시름 앓아 병색이 완연했다. 마님과 하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둘째 딸마저 독살할 계획을 세웠다.
“죽일 약은 다 준비되었소?”
“이만큼 모으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오. 숨을 끊기에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그년이 병약하니, 약을 먹여 죽여도 뒤탈이 없을 것이오.”
여자의 킬킬거리는 낯선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낮게 깔렸다.
둘째 딸의 위기를 감지한 영감님은 밤 중에 몰래 포목점 이층으로 불렀다.
“아버지, 무슨 일로 이 야심한 시각에….”
둘째 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딸아, 그렇게 먹지 않으면 이 아버지 심정이 어떻겠느냐? 살아야 한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내 안다…. 사랑하는 딸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따라야 하느니라.”
“내일 포목점 정리를 마친 후에 이층 놀이판에 와서 나를 돕도록 하거라.”
“이층에요? 저는 한 번도….”
“그래, 정리를 마치면 바로 이층으로 올라오너라. 다른 곳은 가지 말고.”
다음 날, 둘째 딸은 처음 와보는 이층 놀이판에서 손님들에게 차를 대접했다. 윷놀이판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백발 아기씨가 한쪽 구석으로 걸어가 영감님과 둘째 딸을 불렀다.
“말씀하신 대로 둘째 딸을 불렀습니다.”
둘째 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주변은 마치 투명한 결계에 휩싸인 듯, 손님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얘야.”
백발 아기씨가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어르신.”
둘째 딸이 공손하게 큰절하며 말했다.
“이것은 약이다. 집에 가거든 마님이 네게 독이 든 약을 줄 것이다. 그 약은 측간에 버리고, 내가 준 이 약을 몰래 먹거라.”
“네, 말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꺅―! 다음 날 아침, 둘째 딸이 방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이를 어쩌면 좋아. 둘째 따님이…!”
유모가 죽은 둘째 딸의 손을 잡고 슬피 목 놓아 우니 집안사람 모두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나의 딸에게 가장 좋은 신부 옷을 입히거라. 당장 가마에 태워 절에서 화장하겠다!”
영감님은 슬픈 얼굴로 모두를 향해 쇠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가마꾼 외에 그 누구도 뒤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또한 사흘 동안 집안 모든 사람의 외출을 금지했으며, 어길 시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영감님과 가마가 나가자, 포목점의 대문은 굳게 잠겼다.
“이렇게 약이 잘 들 줄이야. 킥킥….”
영감님이 집을 나선 후, 안방에서는 마님의 끔찍한 안도와 기쁨이 담긴 웃음소리가 나직이 새어 나왔다.
07_소문들
두 딸이 사라진 후, 포목점은 몽골군이 휩쓸고 간 것처럼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영감님이 노름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있다는 소문이 개경 전체에 빠르게 돌았다.
“허허, 두 예쁜 딸이 죽고 나더니 영감님이 포목점 이층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군. 완전히 미쳐버린 게야.”
“막내딸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감님 수발만 들며 굶고 있다던데.”
“땅문서까지 팔아치웠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가세가 기운 게 분명하구먼.”
마님과 사내는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재산이 눈에 띄게 사라지는 게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에요. 저 미친 영감탱이 때문에 남은 것까지 다 잃겠어요!”
마님이 사내에게 속삭였다.
“땅문서까지 저당 잡혀 놀았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더군. 당장 서둘러야겠어. 한 푼도 남기지 못하게 할 작정인가 봐.”
사내는 짜증 난다는 듯 혀를 찼다.
“집안 패물은 모두 챙겼소?”
사내는 마님에게 물었다.
“집문서와 패물은 일찌감치 뒤로 몽땅 빼돌렸지요..!”
마님은 평소 드러내지 않던 승리감에 찬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감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으니, 이 집만 빨리 팔아치우면 돼요. 호호~호”
“당장 몰래 집 살 사람을 알아보겠소.”
사내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마님에게 말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포목점이 영감님의 노름빚으로 백발 아기씨에게 통째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내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아는 사촌 말로, 그년이 잔망스럽기가 보통 아니었다는구먼. 부모도 그년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 두 연놈이 몰래 시시덕거리는걸, 내가 직접 봤다니까. 그놈이 치마 안에 손을 집어넣는데, 모른 척하더라니까. 결국 그럴 줄 알았지. 알다 말고.”
영감님과 막내딸마저 종적을 감췄다고 했다. 얼마 뒤, 마님이 몰래 집을 팔아치우고 사내 하인과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개경에 널리 퍼졌다.
08_특별한 성
텅 빈 포목점 이층에는 백발 아기씨와 영감님 둘만 마주하고 있었다.
“영감, 윷놀이판에 손을 대고, 네 것을 꺼내거라.”
영감님이 손바닥을 대자, 윷놀이판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그의 팔을 안으로 빨아들였다.
“어이쿠!”
영감님은 혼비백산했다.
“놀라지 말고, 네 것을 찾아라!”
정신 차린 영감님의 손에 웬 작은 항아리가 잡혔다. 그 안에는 영감님의 집문서와 패물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너의 것을 내 잠시 보관했다가 돌려주는 것이다. 두 연놈이 사악하니, 네 딸들이 있는 서경에 가서 남은 생을 살도록 하거라.”
“백발 아기씨, 이 은혜를 제가 어찌 갚아야 할지….”
“영감은 네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가?”
백발 아기씨의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영감님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집안 대대로 남녀 구분 없이 특별한 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맞다. 성과 관련한 가문 이야기도 아는가?”
“어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듣고 자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누군지도 금방 이해하겠구나. 그대의 먼 조상, 강을 건너던 한 처녀와 까마귀의 인연으로 시작된 ‘수호의 명(命)’을 이어받아, 이 가문을 지켜온 지 삼백 년이다.”
“네? 백발 아기씨께서 저희 집안의 수호신, 도깨비셨습니까?”
“그렇다. 너의 조상과 계약한 오백 년의 시간 중 내가 맡은 시간은 곧 끝이 난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도움이다.”
도깨비는 자신의 긴 백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주었다.
“가문이 위태로워 흩어지거든, 이 머리카락을 잘라 나눠 가져라. 이것을 가진 자들은 헤어져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발 아기씨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한편, 야반도주한 두 연놈은 마님의 몰락한 옛집에 숨어 있었다.
대문은 쓰러지고 지붕은 풀로 덮였으며, 기둥이 부러져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진, 버려진 집이었다. 밤이 되자 안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집 판 돈과 패물을 이렇게나 많이 챙겼으니 새로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여자가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연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영감의 금두꺼비가 서른 개가 넘으니, 이제 부자로 살 수 있겠다.”
연인의 손이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내 목덜미로 내려갔다.
뿌득!
여자의 목에서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 네 덕분이다.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고맙다.”
연인이 잔인하게 여자의 목을 꺾었다.
“흐흐흐.”
연인은 뒤로 젖혀진 여자의 눈을 보면서 해맑게 웃었다. 여자의 눈이 뒤집히는 순간, 사내의 그림자가 쑥 길어지더니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오르는 것이다.
끄르륵…
죽어가던 여자가 천장의 그림자 속 섬뜩한 눈과 마주치더니, 눈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게거품을 물고 사지를 떨다가 축 늘어졌다. 사내는 그 모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금두꺼비와 패물을 상자에 챙기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렸다.
그때, 천장을 가득 채운 거대한 그림자의 머리가 입을 쩍 벌리며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위협했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상자 안의 금은보화는 모두 썩은 나뭇잎으로 변해 있었다.
“으하하!”
천장에서 웅장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자,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검은 얼굴과 눈이 마주친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며칠 뒤, 마을에는 소문이 돌았다. 몰락한 집의 딸이 혼자 돌아왔는데, 완전히 미쳐버렸다는 것이었다.
“깔깔, 자기 어디 갔다가 이제 온 거야?”
밤마다 여자의 귀신같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후로 그 집 근처에는 그 누구도 가지 않게 되었다.
10. 기억해라.
고려, 고려, 고구려, 고려…
지금까지 올린 이야기 순서는 제멋대로였다. 어쨌든 내가 쓴 세 편의 글 조회수는 모두 합해도 열 개를 넘지 않았다.
"햐…. 어쩌지? 이제야 순서가 기억나는데…. 지우고 다시 써야 하나?"
네 번째 이야기를 끝내고 게시판에 올리자마자, 처음으로 댓글이 달렸다.
'넌 연대순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해라!'
그 댓글을 본 순간, 도깨비방망이로 세게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 머리를 강타당하면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따르릉! 따르릉! 오전 6시 30분.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맞춰둔 시끄러운 알람이 꾀꼬리가 우는 노랫소리로 들리다니.
살면서 이렇게까지 몸과 마음이 편한 적이 없는, 그래서 묘한 낯섦이 드는 아침을 맞았다. 몸은 한없이 가벼웠고, 머릿속 뒤엉키고 더럽혀진 뇌가 맑은 호수에 잡티 한 개 없이 씻긴 기분이라고 할까. 지긋지긋했던 편두통과 심심하면 올라오던 목구멍에 머물던 구토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이날의 아침을 항상 그리워한다. 고통의 대가로 얻은 것만 같은, 두 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완벽한 해방감이었으므로.
세수를 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빛이 났다. 상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내려가는 계단은 출근시간의 혼잡으로 인해 이리저리 밀치고 당겨졌지만, 그냥 행복했다.
빼곡하게 들이찬 사람들에 밀리는 와중에도 지하철 손잡이는 꼭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게 보였다.
'뭐지? 실..? 언제 실이 손가락에? 이건, 이야기 속 백발 아기씨의 흰 머리카락...? 뱃사공 처녀...?'
흔들리는 손잡이를 붙든 손의 새끼손가락에 짧은 흰 머리카락 한 올이 묶여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