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목점 영감님 1

by Tigerwood

09. 강물

목구멍 안으로 살점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와중에, 누군가의 거친 손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켁... 켁켁....!" 비릿한 강물 냄새와 함께 붉은 살점을 토해내고 또 토해내는 눈앞의 토사물 사이로, 쪼그려 앉아 있는 할머니의 흰 치마와 닳아서 해진 짚신이 눈에 들어왔다.

"... 해주어야 한다. 힘들어도 네가 해주어야만 한다...."

꿈은 늘 현실보다 잔인할 정도로 무섭다. 눈앞의 할머니로 인하여, 목덜미 뒤로 찌릿찌릿한 소름이 온몸을 타고 널뛰듯 했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할머니가 귀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얀 소복 차림의 귀신.

‘대체 무슨 일로, 이 할머니는 나한테 이토록 무섭게 말하는 거지?’

나는 토사물을 밟고 주춤 일어서며, 이 악몽으로부터 도망칠 기회만을 필사적으로 엿보고 있었다.

"얘야, 부탁한다. 이름으로 이어지지 못한 내 후손을 한 번만 도와주면 된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메말라 버린 강바닥처럼 깊고 오랜 세월의 주름이 얽혀 있었다. 목을 길게 뺀 귀신의 얼굴이 다가올수록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강요된 구원의 의무에 짓눌려 더 뒷걸음질 쳤다.

'무서워. 무서워 미치겠어.'

구부정한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섬찟한 노파의 주름진 얼굴이 땅에 닿을 듯했다. 오랜 손때로 시커멓게 닳은 나무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부들거리는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 손은 마치 햇빛에 방치되어 말라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죽은 지 오래된 나뭇가지 같았다. 뾰족한 손가락이 내 중지에 닿는 순간, 공포와 함께 강물이 밀려드는 차가움에 빠지고 말았다.


"으악!"

외마디 비명으로 인해, 깨고 싶어도 깰 수 없을 것 같던 늪의 미몽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었다.

"헉.. 헉... 헉."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이불에 척하니 들러붙었다. 늘 그렇듯 스트레스가 빚어낸 개 같은 악몽이라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시계는 또다시 불길한 숫자를 가리켰다.

새벽 4시 44분.

재수 없는 불길한 징조가 끈질기게 나를 조롱했다.

"젠장, 젠장...."

머리는 깨질 듯한 편두통에 시달렸다. 침을 삼킬 때마다 헐어버린 입안이 따끔거렸다. 열이 나고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단단히 몸살까지 겹친 모양이었다.

새벽 4시 47분…. 지독히도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잠옷 위에 두꺼운 옷가지를 껴입고, 이불까지 뒤집어썼다. 필사적으로 떨리는 손가락을 진정시키며 노트북 앞에 어쩔 수 없이 앉았다. 빨리 이것을 끝내야 했다. 이 악몽 같은 현실을 잠시라도 끝내 줄 네 번째 이야기를.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 그 이야기를 나는 절실히 필요로 했다.

노트북 화면 속에는 밤을 삼킨 퀭한 눈의 낯선 괴물이 앉아 있었다. 불길한 건, 그 눈이 내 모습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 으, 으웩....!"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구토했다. 다행히 키보드는 피했지만, 입에서 수도꼭지라도 튼 것처럼 꽤 많은 물이 쏟아져 나왔다. 비릿하고 퀴퀴한 강물 냄새가 역겨움을 더하게 되면서, 또다시 구토할 수밖에 없었다.

"웩! 웩! 웨엑....!"

바닥에 쏟아진 구토물 위로 어떤 형상이 물안개처럼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나를 못 알아보겠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거늘, 제발 진정하거라. 얘야."

왠지 낯설지 않은 얼굴에 그만 얼어붙었다. 머리까지 딱딱하게 굳어 도망칠 수가 없었다.

"지금부터 네가 잊고만 네 번째 이야기인 <포목점 영감님>을 알려주겠다. 가문의 이름을 잊고 있는 내 후손을 위해, 네가 해주어야 할 일에 대한 대가이자 선물이다."


<포목점 영감님>은 인터넷이 뭔지도 모를 귀신인 할머니의 입을 통해 내 손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번 이야기는 또 몇 명이나 보게 될 것인가, 신경이 쓰인다. 이제는 사람들이 보기를 제발... 봐주기를.

나는... 두렵다....





포목점 영감님


“구름에 달 들어가면, 사내가 방 들어가요.”

“저 산에 달 들어가면, 사내가 방 나와요.”

“사내가 들어가고 나오고, 아기가 쑥 나와요.”


기이하고 수상한 노랫가락이 개경의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계절이 바뀌기 전까지 불리어졌다. 마치 다가올 사건을 예고하는 운명의 노래처럼.

고려 덕종 2년, 수도 개경의 한복판, 포목점 영감님에 관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개경 성문을 지나 중심가로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등불을 밝힌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길목 중간에 이층 포목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일층은 온갖 화려한 천을 파는 상점이었고, 이층은 은밀하고 호화로운 놀이와 향응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포목점 주인은 젊은 시절부터 기름지고 유들거리는 성품과 여우 같은 장사 수완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삼십 대에는 집 창고 아래, 자신만이 아는 비밀 지하실을 만들어 재물을 모으는 은밀한 쾌락에 빠져 살았다. 사십에 아내와 사별한 후에도 세 딸과 함께 포목점을 번성시켰다. 오십에 접어들자, 그의 인자한 미소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 쓰였고, 주변을 챙길 줄도 알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포목점 영감님이라며 칭찬했다.

영감님은 예쁜 세 딸을 보러 젊은 사내들이 몰려오는 게 은근한 자랑거리였다. 총각들은 어머니를 앞세워 천을 고르는 척하며 딸들과 말 한 번 섞어보려 애썼고, 중매쟁이들은 혼기가 아직 먼 막내를 제외한 두 딸을 중매하려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였다. 영감님에게는 부러울 것이 하나 없는 완벽한 나날이었다.


01_놀이판

그러던 어느 날, 영감님의 재혼 소식이 개경 전체의 화제가 되었다. 신부는 영감님의 큰딸과 나이 차가 거의 나지 않는 만삭의 여인이었다. 몰락한 가문의 여식인 그녀는 여자 몸종 하나와 사내 하인 하나를 데리고 와 포목점의 새로운 마님이 되었다.

결혼한 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아들이 태어났다. 잠시 멈췄던 이층의 놀이판은 백일이 지나 다시 열렸다. 갓 태어난 아들은 온종일 울다가도 시끄러운 이층에서 더 잘 잠들었기에, 영감님은 아들을 안고 종종 놀이판에 데리고 왔다.

특히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가장 높이 뜨는 밤에는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 놀이판의 주인이 되곤 했다. 나이는 칠십이 넘어 보였으나, 큰 키와 장대한 기골은 늙음을 잊은 듯했고, 백발을 처녀처럼 엉덩이까지 길게 땋아 다들 농으로 ‘백발 아기씨’라 불렀다.

백발 아기씨는 개경 지도가 새겨진 신비한 윷놀이판 보자기를 가지고 다녔다. 옥으로 만든 윷과 말은 물론, 사람 주먹만 한 금두꺼비 다섯 개를 늘 앞에 두어 그 신비로운 재력을 과시했다. 소문에는 그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신통한 재주를 가졌다고 했다. 윷놀이판을 펼치면 참여한 손님들의 집이 저절로 표시되었고, 자기 집에 말이 도착하면 금두꺼비를 선물로 주었다. 손님 모두는 윷놀이의 승패보다 금두꺼비라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 특별한 놀이판에 초대받는 것은 개경의 노름꾼들 사이에서 최고의 자랑거리였고, 영감님은 덕분에 보이지 않는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02_시선

영감님이 새장가를 가고 뒤늦게 아들까지 얻자, 큰딸에게 쉴 틈 없이 중매가 들어왔다. 홀로된 아버지를 모시느라 혼기가 찬 줄도 모르고 살았던 큰딸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집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생각이 많아진 그녀는 밤마다 방 앞 동백나무 아래서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리고 그런 큰딸을, 마님의 사내 하인이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 훔쳐보았다.

어느 날 밤, 그림자 속에만 머물던 하인이 큰딸에게 다가왔다.

“아기씨, 달밤에 추운데 나와 계시는군요.”

“네가 어쩐 일로 이곳까지 왔느냐?”

“마님께서 아기씨께 귀걸이를 전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어머님께 고맙다고 전해라. 하지만 밤이 늦었으니 다음부터는 낮에 오도록 해라.”

하인이 건넨 귀걸이를 받아 든 큰딸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며칠 뒤, 마님은 절에 공양하러 간다며 길을 나섰다. 두 딸이 공손히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 공양하러 간답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딸들이 포목점으로 향하자마자, 마님은 다정했던 표정을 짜증으로 갈아입으며 돌아섰다. 그때, 큰딸의 뒷모습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하인을 발견했다.

“이놈! 뭘 그리 보고 있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님.”


그날 밤, 포목점 이층에서 다시 윷놀이판이 열렸다.

“백발 아기씨, 늘그막에 얻은 잘생긴 아들의 관상 좀 봐주시구려.”

영감님은 자랑스러운 듯 아들을 내밀었다.

백발 아기씨는 아기의 눈을 찬찬히 살핀 후, 영감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기 코에 숨을 불어 넣고는, 아기 입에서 나오는 숨 냄새를 깊이 맡았다.

아기의 숨 냄새가 아비와 전혀 다르군.... 닮은 건, 숨어 쳐다보는 사악한 그놈이로구나.’

“아기가 영특한 건 엄마를 닮았고, 외모는 아비를 똑 닮았군.”

백발 아기씨는 의미심장하게 빙 둘러 말했다.

“하하, 소싯적에 이 몸이 처자 꽤 울렸지요.”

영감님은 칭찬에 크게 웃었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영감, 궁금한 게 또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말해보게.”

“역시, 백발 아기씨십니다. 제 큰딸이 혼기가 차서 빨리 보내야 하는데, 아내가 중매 들어온 집들을 탐탁지 않아 합니다.”

백발 아기씨가 영감님의 귀를 세게 잡아당기며 서늘하게 속삭였다.

“큰딸을 최대한 빨리 이 집에서 내보내게. 목숨이 위험하네. 알아들었나?”

“그럼요, 빨리 결혼시켜야죠.”

영감님은 백발 아기씨의 말을 자기 편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그 서늘한 경고는 이날 이후 영감님 마음에 씨앗으로 싹을 틔웠다.


03_각성

사흘 뒤, 깊은 밤에 마님의 여자 몸종이 큰딸 방에 뜬금없이 찾아왔다.

“아기씨, 마님이 급히 찾으십니다.”

몸종이 앞서 걷다가 일부러 넘어지며 등불을 꺼뜨렸다. 큰딸이 몸종을 재촉하며 안채로 들어서려는데, 마침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내 하인의 뒷모습을 보고 말았다. 놀란 큰딸이 뒤로 주춤 물러서자, 몸종은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 야밤에 하인이 어머님 방에 왜 들어가지?’

의문은 금방, 그리고 처참하게 풀렸다.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격렬한 교성 그 자체였다. 큰딸은 충격에 비틀거리다가 무릎이 풀려 넘어졌다.

“밖에 누구냐?”

마님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치맛자락을 얼핏 보았지만, 눈썰미가 남달랐기에 그것이 큰딸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한편, 영감님은 아내와 몸을 섞을 약속한 내일 밤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님의 몸종이 다급히 영감님을 불렀다.

“어르신, 꼭 보셔야 할 것이 있사옵니다.”

영감님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그녀를 따라나섰다. 아내의 방문 앞에서 영감님은 두 남녀의 교성과 충격적인 대화를 모두 듣고 말았다.

“큰 년한테 자꾸 눈길을 주던데, 마음이 있는 거야?

“아니라고!”

“흥. 저기 상자 보이지? 저걸로 그년을 처리해. 네 손으로, 반드시.

영감님은 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끼며 몸종을 지하실로 끌고 가 모든 자백을 받아냈다.

“흑흑, 마님이 결혼하기 전부터, 저는 저 사내놈과 정인으로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제가 임신한 것을 안 마님이 사흘 밤낮으로 힘든 일을 시켜 아이를 낙태시켰습니다. 사내놈은 그 후로 저를 멀리하더니, 둘이 달라붙어서… 흑흑흑.”

몸종은 복수심과 슬픔에 흐느꼈다.

“네년이 아내의 불륜을 알린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사실대로 말하거라!”

영감님의 목소리는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낮게 떨릴 뿐이었다.

“낙태 후로 마음에 맺힌 한을 풀지 못하였습니다. 어르신, 내일 밤에 마님이 큰따님을 그놈과 함께 절에 보낸다고 합니다. 마님이 분명히 뭔가 일을 꾸미는 듯합니다.”

영감님은 섣불리 아내를 벌할 때가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다. 섣불리 일을 처리했다간 모든 게 틀어질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던 것이다. 비록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둥거렸지만, 이제 영감님은 딸에게 닥친 죽음의 위험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만으로 눈의 핏줄들이 연이어 터져 나갔다.


04_윷판

다음 날 밤, 포목점 이층에서는 윷놀이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영감님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모른 척 말판에 참여했다. 그런데 영감님의 말이 판에 오르자, 엉뚱하게도 개경이 아닌 머나먼 산길에 집이 표시되었다.

“백발 아기씨, 집이 평소 같지 않게 먼 산길에 표시되었습니다.”

심란했던 영감님은 불길함에 물었다. 백발 아기씨는 아무 대답도 없이 윷놀이를 진행할 뿐이었다. 돈이 걸리고 흥이 오르니 노름판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허! 거의 다 왔는데, 이게 무슨 불길한 일이란 말인가.”

집 한 칸 전에 모였던 영감님의 말들이 한 번에 죽는 일이 세 번 연속으로 반복되자, 영감님이 돈을 모두 잃었다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끝까지 놀이판의 자리를 지켰던 영감님의 극심한 불안을 본 백발 아기씨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큰딸이 엄한 연놈한테 걸려 곧 죽겠구나.”

나가려던 영감님이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고 큰절했다.

“제발 딸을 살려주십시오!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주변의 손님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둘만의 대화가 이어졌다.

“내일 아침이면 큰딸이 죽었다고 전하는 이가 있을 거네. 그가 네 딸을 죽인 범인이야.


“백발 아기씨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이오?”

“딸을 살리려면, 네 집에서는 죽어서 나가야 한다. 죽은 그대로 두거라. 그러면 살 길이 열릴 것이다.”

백발 아기씨가 귀에 절박한 계책을 속삭여 주자, 영감님은 당장 지하실로 달려가 짚으로 작은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의 몸통에 큰딸의 옷을 잘라 걸치고 화장품까지 발라 사람처럼 보이게 한 후, 그것을 옷소매 안에 감췄다.


영감님은 백발 아기씨에게서 들은 계책대로, 딸을 살리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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