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주는 무한한 감동
"엄마, 우리 자리 맞아? 기차가 KTX보다 더 좋은 것 같아!"
뮌헨 중앙역에서 슈투트가르트로 향하는 고속 열차 '이체(ICE)'에 올라탄 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뮌헨에서 보낸 이틀이 완벽한 적응 훈련이라도 된 걸까. 더 이상 피곤에 찌든 사춘기 소녀는 없었다. 물론, 핸드폰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낯선 나라의 풍경이 신기하긴 한 모양인지, 틈틈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며 "와, 저거 양인가 봐!" 하고 감탄사를 던져주었다. 그 '성은'에 힘입어 '밖에 좀 보라'는 잔소리는 마음속에 고이 넣어두기로 했다.
슈투트가르트는 뮌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바이에른 특유의 고풍스러움보다는 조금 더 현대적이고 착실한 공업 도시의 분위기랄까. 우리는 중앙역 공사 현장을 요리조리 피해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딸이 아침부터 노래를 부르던 포르쉐 박물관으로 향했다.
"와... 엄마, 나 심장 터질 것 같아. 여기는 천국이야?"
BMW 박물관에서 이미 예열을 마친 딸은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였다. 유선형으로 빠진 날렵한 스포츠카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며 "엄마, 나 이 차 사줘. 크면 꼭 이거 탈 거야!"라며 셔터를 눌러댔다. '면허 따고 네 돈으로 사렴'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아이의 반짝이는 눈을 보니 그저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제는 걷기 싫다며 툴툴대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딸은 몇 시간 동안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박물관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자, 이제 네가 가고 싶은 곳 갔으니까 엄마가 가고 싶은 곳 갈 차례야."
"어딘데? 또 미술관이야? 나 다리 아픈데..."
에너지가 방전된 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딸의 손을 이끌고 도착한 곳은 새하얀 정육면체 모양의, 창문도 거의 없는 밋밋한 건물이었다.
"엄마, 여기야? 대체 여기가 뭔데?"
"일단 들어가 봐. 깜짝 놀랄 걸?"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딸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 우리는 동시에 숨을 헙, 들이마셨다.
"우와... 뭐야... 여기 도서관 맞아? 무슨 영화 세트장 같아!"
그곳은 바로 슈투트가르트 시립 도서관이었다. 사방이 온통 새하얗고, 뻥 뚫린 중앙을 빙 둘러 책장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비현실적인 공간. 딸은 툴툴대던 것도 잊은 채,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며 "세상에 이렇게 멋진 도서관이 있다니. 여기서 공부하면 전교 1등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래, 이 녀석아. 사실 엄마가 슈투트가르트에 오자고 한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였단다. 세상엔 자동차보다 더 조용하고, 더 깊고, 더 멋진 세계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 디자인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단숨에 압도당하는 '공간의 힘'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하얀 공간을 배경으로 딸의 인생샷을 또다시 백만 장쯤 찍어주고 나서야 우리는 도서관을 나섰다.
"엄마, 오늘 저녁은 뭐 먹어? 학세만큼 맛있는 거야?"
기대감에 가득 찬 딸을 데리고 슈바벤(슈투트가르트가 속한 지역)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주문한 음식은 바로 마울타셴(Maultaschen).
"오? 이거 우리나라 만둣국이랑 비슷한데? 만두가 엄청 크다!"
따끈한 수프에 담겨 나온 거대한 사각형의 만두를 보며 딸이 신기해했다. 잘게 다진 고기와 채소, 빵가루로 만든 소를 파스타 반죽으로 감싼 음식이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문 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 이거 완전 내 스타일! 만두보다 훨씬 부드럽고 고소해. 김치만 있으면 딱이겠다!"
"그러게, 완전 '독일식 왕만두'네."
우리는 따끈한 마울타셴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며 오늘의 놀라움에 대해 한참 이야기했다. 포르쉐가 주는 속도와 우아함, 그리고 도서관이 주는 고요함과 지혜.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묘하게 어울렸던, 완벽한 하루였다.
그리고, 호텔 침대 위
"아... 엄마... 오늘도 내 발바닥이 말을 거는 것 같아... 살려달라고..."
침대에 대자로 뻗은 딸의 발에 오늘도 어김없이 휴족시간을 정성껏 붙여주었다.
노곤한 몸에 눈꺼풀도 무거워진 딸이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지, 엄마. 솔직히 도서관 간다고 했을 때 엄청 시시할 줄 알았거든? 근데 포르쉐 박물관만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멋있었어. 진짜 신기한 경험이었어."
천장을 보며 조곤조곤 말하는 딸의 목소리에 오늘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기특한 내 새끼.
"그치? 엄마도 오늘 뭔가 많은 감동을 받은 것 같아."
"그럼... 내일은 또 어떤 멋진 걸 보러 갈 거야?"
딸의 물음에 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은 할아버지 보러 갈 거야. 너도 아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누구...? 우리 독일에 아는 사람도 있어?"
이 녀석, 궁금해서 잠은 잘 수 있을까 싶었는데, 3초 만에 곯아떨어졌다. 새근새근 숨을 쉬며 푹 자는 아이를 보며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역시 잘 때가 제일 예쁘다니까. 내일 만날 '할아버지'는 과연 누구일지, 아이의 반응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