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습니다.

by 슬미

가난에 의해 시체의 머리카락을 훔치고, 예술 작품의 완성을 위해 인간성을 외면하고, 볼썽사나운 외모로 움츠러들며, 인생의 장난처럼 한 순간 아이를 잃거나 인간 세계에 정을 못 붙이고 요정들의 세계를 동경하는 사회 부적응자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이라는 단편집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으레 단편소설의 주인공이 그렇듯이 안락하고 안정적인 환경에 있는 주인공은 한 명도 없다. 이 책은 100년 전에 쓰였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좋은 책으로서 꼽히고 있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악하거나 반사회적인데 왜 양서로 꼽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철학적 사유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보다 못한 삶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 내 삶이 좀 더 낫구나 하는 우월감에 위로를 받고, 또는 죽음이라는 큰 상처로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을 보면 나의 비루한 삶은 저것보단 덜 힘들구나 하는 위안을 받게 된다. 나는 저 정도로 최악의 상황은 아니니 이 정도면 살만한 인생이구나 싶다. 소설 속 아이를 잃은 엄마가 다른 집의 아이가 죽게 되면서 응어리가 풀리는 것과 비슷한 감정일 것이다.

“죽은 것이 기뻐요. 안 됐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기쁘다고요.

기뻐해서는 안 되는 걸까요? 여보”

누군 아마 솔직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악한 마음을 포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동병상련의 아픔이라고 하지 않는가? 홀아비의 힘듦은 과부가 알기 마련이며 잉꼬부부의 위로는 전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의도로 위로를 하지만 속으론 우월감에 사로잡힌 위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또 좋은 의도를 굳이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꼬인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 말도 일리가 있고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꼭 그래야만 한다는 건 없다. 악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나는 위로받는다. 친일파의 후손은 대대손손 재력을 쥐고 있고, 아이를 성폭행하고 죽인 살인마는 죄 값이라는 명목으로 옥생활을 했지만 시간이라는 면죄부로 다시 풀려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 이렇게 세상엔 부조리함과 악하지만 더 잘 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러니 착하게 살라는 말은 공허하기만 하다. 사는 것도 팍팍한데 마음이라도 좀 악하게 먹으면 어떤가? 그렇다고 살인을 저지를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면 또 그럴 것이다. 그런 반사회적 생각이 결국 너를 범죄자로 만들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상처가 보이지 않게 꽁꽁 싸매면 결국 고름이 터져 버리는 것처럼 인간의 감정이란 것도 표현하고 분출하지 않으면 곯아서 터져버릴 수도 있다.


책이, 그중에서도 소설이 그 고름을 건드려서 짜내주는 면봉 역할을 한다. 책 속엔 다양한 아픔과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서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배우곤 한다. 사람과 책의 차이는 감정이입일 것이다. 책 속엔 인물의 서사를 통해 아픔과 치유의 과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지만, 사람의 말은 그가 아무리 경험을 통한 조언을 하더라도 그 경험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

스토너라는 소설책이 있다.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한 남자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생의 마지막은 영문학 교수로 마감을 했다. 그는 오로지 하나만 보며 묵묵하게 인생을 버텨냈지만 빛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소신껏 살아낸다. 글의 기역 자도 관심 없던 내가 스토너를 읽고 난 후 글이 쓰고 싶어 졌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건 빛나는 성공이 아니라 뚝심 있게 나를 믿고 버텨내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타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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