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얘기를 하다 보면 늘 비슷한 결론에 이른다.
많이 벌면 많이 쓰게 되고, 적게 벌면 적게 쓰게 된다.
그래서 정말 좋은 방식은 “많이 벌고, 적게 쓰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근데 그 말이 참 쉽지 않다.
많이 벌기 위해서는 더 바쁘게 살아야 하고, 더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보다
‘이 삶이 내 몸과 마음에 맞는가’를 더 자주 묻게 되었다.
어느 날, 연수 모니터링으로 부산의 한 건물에 갔다.
공장 같은 건물 여러 채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주차장은 복잡했고, 안내판도 없었다.
1층인 줄 알고 들어간 곳이 사실은 다른 층이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번이고 위아래를 오르내려야 했다.
마치 인생의 어딘가에 와 있는데
정작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적힌 표지판은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전화로 위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제서야 겨우 찾은 교육장은
건물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섬처럼 느껴졌다.
그날 강의를 하던 강사를 보며 나는
연수 내용보다 사람의 이력에 더 눈길이 갔다.
대학원, 연구회, 지역 커뮤니티, 강사 활동,
한 지역에서 쌓은 점수와 이동,
그리고 결국 지금의 자리.
그 인생 경로는 결코 우연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고,
한 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기 어려운 구조처럼 단단해 보였다.
나는 그 삶이 부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질투도 났다.
‘나는 왜 저기 있지 못했을까.’
‘나는 왜 저 기회 속에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을까.’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강의실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마음은 편해졌다.
“아, 그렇구나. 저 사람의 길이 여기였고,
내 길은… 여기가 아니었구나.”
나는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늘 저녁이 있는 삶을 선택해왔다.
주말이 있는 직업을 택했고,
방학이 있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 선택은 나름대로의 포기였고,
동시에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길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나의 많은 시간을 내어주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교환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 강사는 말했다.
“관심이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에요.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죠.”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사람은 이성으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실은
무의식이 방향을 정한다.
무대가 편한 사람,
관계가 좋은 사람,
앞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
그리고 나처럼
조용히 퇴근하고,
저녁을 먹고,
하루를 정리하는 삶이 편한 사람.
나는 아마
처음부터 저 길로 갈 수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도 조금 부럽기는 해.”
그랬더니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본인이 편안한 방향이면, 그게 의미 있지 않나.”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우리는 종종
‘성공’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너무 다른 삶들을 재단해 버린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얼마나 올라갔는지가 아니라
어디까지 가야 나답게 숨을 쉴 수 있는가가 아닐까.
연수를 다녀온 것이 아니라,
나는 그날 내 인생을 잠깐 밖에서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부러워한 건
그들의 돈이 아니라
그들의 확신이었고,
내가 지키고 싶은 건
돈보다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나는 오늘도 큰돈을 벌지는 못한다.
하지만 저녁이 있고,
아내와 나누는 말이 있고,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 있다.
그 정도면
내게는 충분히 부유하다.
돈 말고,
나는 이 삶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