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가는 길: 일상의 허물을 벗는 정직한 시간

우리는 왜 공항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 여행의 시작점 에세이

공항철도 창가에 기대어, 비로소 가벼워진 나의 허물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여행의 절반을 완성한다.


캐리어 바퀴가 아스팔트를 긁는 규칙적인 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설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짊어지고 살던 일상의 무게를 실감한다. 현관문을 잠그는 행위는 단순히 도난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난 몇 달간 나를 짓눌렀던 책임과 역할들로부터 잠시 나를 격리하는 의식에 가깝다.


공항철도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익숙한 서울의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 몸에 딱딱하게 달라붙어 있던 '직업'과 '관계'라는 이름의 허물들을 하나씩 벗겨내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동료이자 가족이고, 사회의 일원이었던 나라는 존재는 인천공항이라는 거대한 정거장에 가까워질수록 그저 이름 석 자만 남은 한 명의 여행자로 수렴된다.


공항에 도착해 여권을 꺼내는 순간, 나는 생경한 자유를 맛본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저 몇 번 게이트로 가야 하는지, 내 수하물의 무게가 규정을 넘지 않았는지만이 유일한 관심사가 된다. 일상에서는 결코 허용되지 않던 '무목적의 대기'가 이곳에서는 당연한 권리가 된다.


면세점의 화려한 불빛 사이를 지나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면, 저마다의 사연을 품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이라는 전장에서 잠시 휴전 선언을 하고 도망쳐 온 탈영병들일지도 모른다. 그 도망이 비겁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 허물을 벗는 시간 없이는 다시 그 무거운 일상을 버텨낼 재간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고 탑승교를 건널 때, 발밑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은 내 심장박동과 닮아 있다. 기내에 들어서서 좁은 좌석에 몸을 구부려 앉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넓게 펴진다.


이제 곧 통신 신호가 끊기고 구름 위로 솟아오르면, 나를 찾던 수많은 연락과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은 지상에 남겨질 것이다. 공항으로 오는 길 위에서 나는 충분히 가벼워졌고, 이제 남은 것은 낯선 땅에서 다시 채워 넣을 새로운 감각들뿐이다. 일상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진짜 나를 다시 마주하기 위한 정직한 준비 과정이다. 나는 이제 비행기 창문을 닫고, 고요해진 나 자신과 나란히 앉아 이륙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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