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를 허용하는 삶

표류의 필연, 방황의 묘미

by 조용히 있을래요

https://youtu.be/2 YLonjnptTw? si=_o9 EzANQulNl3 eOR


"저는 인생 전체를 성실하게 살면 어떤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거든요.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하고요. 아무리 열심히 살고 특정한 목적을 향해서 가려고 해도 얼마든지 또 다른 쪽에서 표류할 수 있다고 봅니다." _ 이동진 평론가


표류하는 시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면, 끊임없이 가고자 하는 길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면 언젠가 내가 끝이라고 여길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나는 변화할 거고 이 괴로움이 씻기 듯 사라질 때를 기대하며 매일같이 새로운 내가 되겠다고 선언하며 보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가 처절하게 고민해 온 지난 시간들은 날 유토피아에 데려다주지 않았다.


토네이도에 휩쓸리듯 정신 차려 보니 전혀 예상치 못한 세계에 도착해 있거나, 내가 갈망하는 정답을 앞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었던 시간들을 겪었다. 나의 의지라는 건 결국 인지 너머에 있는 우주의 질서와 삶의 굴곡 안에서 작은 불똥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Winslow_Homer_-_The_Gulf_Stream_-_Metropolitan_Museum_of_Art.jpg Winslow Homer, The Gulf Stream, 1899. Metropolitan Museum of Art


표류의 필연


가수 장기하가 유퀴즈에서 한 말이 생각이 난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엇인가를 이룬다고 생각했지만, 크게 보니 인생은 그냥 파도 위에 떠서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 같다고.


자신이 마땅한 좌표값 위에 서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표류를 훨씬 더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상태로 이해해야 한다.

표류하기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그리는 방향대로 흐르지 않고, 심지어 내가 믿고 있는 ‘나’에 대한 정의조차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기’, 혹은 ‘지금 이 순간만 단정하기’를 실천하려 한다.


남을 판단하는 일도 그렇다. 누군가를 ‘어떤 사람’이라 단정 짓기엔, 그 사람이 처한 그 순간의 특수성이

그의 인생 전체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점점 깨닫는다. 그 깨달음은 나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지금 내가 어디에 표류하든, 그것은 내 서사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잠시 표류 중인 나 자신을 탓하기보다, 그 시간조차 내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한다.


비교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우리는 ‘만족’보다 ‘불만족’의 상태에 더 익숙하다. 경제적 자유, 부의 추월차선 같은 단어들은 물론, 나의 위치, 나이, 외모조차도 끊임없이 비교의 잣대 위에 놓인다. 우리는 늘 “어딘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행복할 수 없다”라고 믿도록 학습되고, 그 결과, 끝없는 불만족의 사이클 속에서 스스로를 몰아붙이게 된다.


그러나 나는 방황도 삶의 일부이자 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루하루를 탐험의 시간으로 여기며, 파도에 휩쓸리더라도 돛대가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하도록 꽉 붙잡을 힘만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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