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라, 날나리 클럽

노마드 비평 20. 『녹색 일기장』, 이경순

by nomadic critic

1. 날라리? 아니, 날나리!

『녹색 일기장』(이경순, 키다리, 2014)에는

‘날, 나, 리’ 넷이 나온다.

‘날, 라, 리’가 아니다.


‘날나리’에는

“날마다 나를 리드하라”는 뜻이 담겨 있고,

날나리클럽에는 Four 짱이 있다.

만짱, 연짱, 네짱, 미짱.


만화가가 꿈인 만짱 승미,

연예인이 되고 싶은 연짱 수아,

세계적인 네일 아티스트를 꿈꾸는 네짱 민지,

공부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미래에 꿈꿀 게 무궁무진 많은 ‘미래의 짱’ 연주.

각자 꿈꾸는 분야에서 최고, 짱이 되자는 미래를 꿈꾸는

건전한 클럽, 날나리클럽.


그러나 아직은 문자랑 카톡을 끊으면

아무도 없는 섬에 혼자 뚝 떨어진 느낌이 드는 평범한 아이들이고,

『녹색 일기장』은

이 아이들처럼 평범하다.

아니, 평범하지 않다.


현실성과 다양성의 미명 아래

자극적인 소재에 탐닉하는 청소년소설이 쏟아져 나오는 지금,

독보적인 주인공이 아니라서 오히려 평범하지 않다.

작가가 중2병으로 규정짓지 않은 날나리들이

참 찬란하다.


귀띔하자면,

『녹색 일기장』은

‘타디스(TARDIS)’를 아주 살짝 닮았다.

타디스는

영국 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에서

닥터가 타고 다니는 타임머신으로,

밖에서 보면 전화박스처럼 생겼지만

내부는 엄청나게 넓다고 설정되어 있다.

『녹색 일기장』도 그렇다.

밋밋한 제목보다 내용이 훨씬 알차다.

이경순 작가의 등단작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문학사상사, 1998)와

쌍벽을 이룰 만하다.


2. 열다섯과 마흔다섯, 이연주와 오영자 씨

괜찮은 책이

괜찮은 까닭 가운데 하나는

다른 괜찮은 책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는 사실이다.

『녹색 일기장』은

질풍노도의 청소년들에게

까뮈와 헤세를 소개해 준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도 태어나는 셈이다.

그리고 열다섯 살 연주가 제2의 탄생 시기에 들어서니,

마흔다섯 살 엄마도

까뮈의 말처럼 ‘위대한 의식의 순간’을 겪게 된다.


연주의 세계는

중학생이 되어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승미를 만나면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가 된다.


오영자 씨는

정보력 좋은 헬리콥터 맘이었다.

아침마다 딸이 먹을 주스를 만들고,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시켜 주고,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동할 때 차에서 먹을 간식을 챙기고,

새학기가 되면 과목마다 참고서랑 문제집을 다 준비해 주었다.


그러다가 말 잘 듣던 딸이 사춘기가 되자

혼란스러운 세계로 진입한다.

어느 날, 온라인 날나리까페에서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고 명동을 누비는 모습

(사실은 어쩌다 한 번씩 스트레스 풀기용),

승미가 그린 만화,

민지가 올린 네일아트 사진들,

수아 방의 연예인들 이력이나 화보를 보고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오영자 씨는

미처 ‘날나리’들의 꿈과 노력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수박 겉핥기로 ‘날라리’라고 단정하며

연주의 변화를 친구 탓으로 몰아붙인다.


그러자 연주는

엄마의 다그침에,

피우지도 않는 담배 얘기까지 하며 대든다.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

상대방에게 부정적으로 무시나 치욕을 당한 경우에

즉, 상대방에게 낙인이 찍힌 경우에

부정적인 영향을 당한 당사자가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현상)다.


연주는

엄마의 어이없는 행동들 때문에 속이 터질 것 같아

툭하면 죽고 싶다고 소리치지만,

오영자 씨 마음도 너덜너덜하다.

열다섯 이연주와 마흔다섯 오영자 씨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오늘도 흔들리고 있다.


사람은 길에서 자란다.

5박 6일, 만주 벌판의 요동(랴오둥) 여행으로

열다섯 연주가 자라고, 마흔다섯 엄마도 자랐다.


그리고 사람이란 단순하지 않아서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 표면처럼

한쪽 면만 보다 보면

다른 쪽도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엄마니까 다 안다고 여기던 딸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오영자 씨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자각하게 되었다.


여행이 끝나는 날,

엄마는 연주에게

“이번 여행 포기하려고 했었는데

잘 온 것 같아. 여기 와서 많은 걸 생각하고,

깨닫고, 또 알게 됐거든.”,

“엄마가 생각한 만큼 네가 어리지 않다는 것,

그리고 네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라고 말한다.

늘 누군가를 위해 사느라

온전히 자신을 위해 산 적이 없는 오영자 씨가

더 늦기 전에 남은 인생 스스로를 위해 멋지게 살고 싶다고 마음먹는다.


연주도 마찬가지다.

대인 페리 호가 인천에서 출항할 때

“엄마와 함께하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고행이다. 형벌이다.”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선상에서는

“이번 여행 안 왔으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라고

180도 뒤바뀐 마음을 편지로 고백한다.


- 진짜야 엄마,

여기 오길 너무 잘했어.

휴대전화하고 상관없이 말이야.

왜냐하면…… 이번 여행을 통해 참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거든.

엄마랑 15년이나 같이 살면서도

내가 엄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는 거,

내가 정말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거.

그리고 이건 제일 중요한 건데,

아주 멋진 아이를 알게 되었다는…….


3. 열다섯, 흔들리는 아이들

줄탁동시(啐啄同時),

줄(啐)과 탁(啄)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 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


연주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할 때,

승미는 밖에서 쪼아 준다.

연주와 처음 짝꿍이 되었을 때

승미는 쉴 새 없이 공책에다 낙서나 해대는 그저 그런 애였다가,

연주로서는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만화 솜씨를 가진 아이로 인식되었다가,

마침내 연주의 등대가 된다.


살다 보면 연주처럼

등대 같은 존재를 만날 때가 있다.

승미가 알을 깨고 나오도록 밖에서 쪼아 준 사람은

초등 5학년 때 미술학원에서 만난 고등학생 언니다.

승미에게도 등대가 있었고,

승미는 연주에게 등대가 되었고,

연주도 언젠가 누군가의 등대가 될 것이다.


『녹색 일기장』에는

열다섯이 일곱이나 나온다.

날나리클럽 승미, 수아, 민지, 연주.

30년 전 깡순이와 지수.

그리고 연주가 여행에서 만나는 최강산.


이 책에서 시간은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데,

연주의 회상이 지난 1년 반을 담아내고,

엄마가 연주에게 건넨 녹색 일기장으로

시간을 거슬러 한 세대 전 깡순이와도 만날 수 있다.

열다섯 살,

연주와 깡순이는 나이는 같지만

둘의 상황은 시간 간격만큼이나 다르다.


연주는 아직 꿈이 없지만,

깡순이는 꿈이 두 개나 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과 국사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깡순이는

엄마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난 이다음에 진짜 건강하게 오래 살 거야.

그래야 내 아이들이 나처럼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도 많이 해 주고,

공부도 하고 싶은 만큼 실컷 하게 해 줄 거야.

참고서도 과목마다 사 주고,

지수처럼 학원도 다 보내 줄 거야.”

라고 일기장에 썼다.


깡순이는 좋은 엄마가 되었을까?

깡순이도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엄마는 욕심이 많다.

그렇지만 연주가

독립된 인격체로 홀로 서기 위해서는

오영자 씨처럼 놓아 줄 수도 있어야 한다.


지수는 깡순이 짝꿍인데,

너무 챙겨주는 엄마 때문에 가출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할머니와 동생을 넷이나 챙겨야 하는 깡순이 눈에는 한심하게 비치지만,

지수처럼 부족함 없이 갖고 누리는 연주에게는

지수도 치열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아이라고 이해된다.


연주는

자기를 친구들에게서 떼어 놓고

외톨이로 만들려는 엄마가 계모인지 의심하지만,

강산이 엄마야말로 새엄마로 밝혀진다.

연주가 보기에

씩씩하고 밝아서 아무 고민 없을 것 같은 강산이는

정작 엄마랑 다투는 연주가 부럽다.

잘해 주지만 깍듯한 새엄마가 편하지 않아서다.


작가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열다섯 살은 힘들다고 말한다.

열다섯은 시대를 불문하고 흔들리는 나이인 모양이다.

하기야 고구려 때도

어른 눈에 이유 없는 반항으로 비치는 열다섯이 없었으랴.


4.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와 『녹색 일기장』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중국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추진한 국가적 연구 사업,

동북공정(東北工程)은

자국의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로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시도이다.

동북공정이 성공하면

고조선의 단군이나 고구려 광개토 태왕은

중국 지방 부족 수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 정부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하였다.


역사는

과거인 동시에 현재이자, 미래이다.

오늘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으로

과거사가 바뀔 수 있듯이,

현재의 기록이

언제든 미래를 다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결코 박제되지 않는다.


이경순 작가는

첫 동화책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로

이 땅의 아이들이 고구려로 가는 길에 징검다리를 놓기 시작하더니,

첫 청소년소설 『녹색 일기장』으로

징검다릿돌 하나를 더했다.


“달기야,

네 몸 속에는 고구려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너는 고구려인의 후손이야…… 잊지 마.”

-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 179쪽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는

판타지 동화다.

6학년 초등학생 달기, 은수, 문수, 석주 사총사는

컴퓨터 속의 ‘아! 고구려 방’을 통해 고분 벽화 속으로 들어가,

온달 장군과 사냥을 하고

양만춘 장군과 안시성 싸움을 치르며

고구려 역사를 직접 체험하고,

1997년에 도굴당한

장천 1, 2호분 벽화를 찾으려고

중국 정부 컴퓨터 해킹을 시도하며 끝난다.


『녹색 일기장』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조선, 고구려, 발해, 부여 활동 무대였던 동북삼성지역 현장을 찾아간다.

인천→대련→단동→집안→통화→백두산→통화→심양→대련.

탐방에도 충실한 덕분에

읽는 내내 푸르미 탐방단을 따라다닌 느낌이다.

대련에서는

연개소문의 여동생이자

해군사령관 연수영 장군이 성주로 있던 석성의 점장대에 오르고,

‘천지 사방에서

천지를 보려고

천지에 와도

천지를 못 보고 가는 사람이

천지’라는

백두산 천지에 올라서

아리랑을 부른다.


그러나


“중국에선

유적지로 들어선 순간부터

태극기나 한글로 된 현수막, 깃발

이런 거 들고 사진 찍는 거 금지입니다.

무시하고 찍었다간

카메라는 당연히 압수되고,

출국도 못 할 수 있습니다.”


라는 가이드 말이나


“조금 전에

가이드님이 말씀하신 규정은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라는 강사의 말은,

지금 『녹색 일기장』을 읽는 이 땅의 청소년들이

연주처럼 옛 고구려 땅을 직접 밟아 보고,

동북공정을 막을 방법을 찾아 주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부추긴다.

16년 전 『찾아라, 고구려 고분 벽화』를 읽은 열세 살 독자 하나가

2014년 『녹색 일기장』에서

‘고구려 유적 탐방’ 역사 강의를 맡은

탐방단 인솔 강사 ‘심오한’ 씨이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다.


5. 『녹색 일기장』, 너 참 괜찮다

책 제목은

사람의 첫인상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래도 제목만 보는 것과

읽어 보는 것은 또 다르다.

『녹색 일기장』이 그렇다.


작가는

화장을 하고 염색을 해서 날라리처럼 보이는 연주와 주희도

겉보기보다 속이 깊다고 얘기한다.

역사에 무관심하던 노랑머리 여고생 주희는

“강사님 얘기 듣고 있으니

없던 애국심도 생기는 것 같고,

고구려란 나라도 새롭게 보이고,

본 적 없는 오래전 선조들에 대한 경이로움도 생기고,

한편으론 우리는 왜 중국처럼

정부 차원에서 우리 것을 강하게 찾지도, 요구하지도 못하나

한탄스런 맘이 들기도 하네.”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렇게나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찬찬히 읽으면

『녹색 일기장』도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시 「풀꽃」 전문


- 출처: 《어린이책이야기》 2015년 봄호


정채- 출처: 《어린이책이야기》 2015년 여름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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