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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Ch Kim 김현철 Jul 29. 2022

캐번디시-빈 전쟁 1

전쟁이 끝났다. 반드시 승리하리라 다짐하며 참전했던 학생들이 돌아왔다. 성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는 팔을, 어떤 이는 다리를, 또 어떤 이는 눈을 잃었다. 어떤 이는 몸이 멀쩡해도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흔이 새겨졌다. 전쟁이 남겨 놓은 것은 패자뿐이었다. 캐번디시 연구소가 있는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학생은 16,000명이 넘었다. 이들 중에서 2,65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윌리엄 헨리 브래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듬해인 1915년에 큰아들 로런스 브래그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지만, 그의 둘째 아들 로버트 브래그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입은 전상으로 사망했다. 주기율표를 정리한 천재 물리학자 헨리 모슬리도 스물일곱의 나이에 해군 장교로 참전했다가 터키 다르다넬레스 해협에서 적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중성자를 발견하게 될 제임스 채드윅은 독일에 방문하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전쟁 내내 독일에서 수감 생활을 해야 했다. 살아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운이 좋은 셈이었다.      

전쟁에 패한 독일은 참담한 처지에 놓였다. 승전국은 독일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 배상금을 무자비하게 요구했다. 전쟁을 주도한 합스부르크 제국은 영토 대부분이 나누어지고 오스트리아라는 조그마한 나라로 전락했다. 마치 알파 입자와 충돌한 핵이 깨져나가듯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쏜 한 발의 총알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산산이 조각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사람들의 삶을 끝도 안 보이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2천만 마르크 지폐

1919년 2월에만 해도 미화 1달러가 2마르크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는 1달러로 환전하려면 15마르크가 필요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1922년 여름에는 1달러의 가격이 다시 500마르크까지 오르더니 일 년 후에는 삼십오만 마르크까지 올랐다. 급기야 1923년 11월 중순에 1달러는 1조 마르크로 치솟았다. 오백만 마르크와 이천만 마르크짜리 지폐가 시중에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화폐의 가치는 난로를 지필 불쏘시개만도 못했다. 그래도 삶은 이어가야 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도 대학으로 연구소로 돌아갔다. 끼니를 이어가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다시 연구를 시작하였다.     

 

캐번디시 연구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맨체스터대학에서 핵물리학 그룹을 이끌던 어니스트 러더퍼드도 전쟁에 필요한 연구로 바쁘게 지냈다. 그는 잠수함을 탐지하는 음파탐지기를 개발하는 연구를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인 1919년 4월 2일, 지도교수였던 조지프 존 톰슨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 자리를 맡게 되었다. 1860년대 말, 케임브리지대학교는 학생들의 물리학 교육을 강화하려고 전자기학과 열역학을 정규과정에 포함시켰다. 

캐번디시 연구소 입구

그리고 명예총장이었던 데번셔 공작이 내놓은 기부금으로 실험 물리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목적으로 캐번디시 연구소를 세웠다. 연구소 소장으로는 윌리엄 톰슨과 헤르만 헬름홀츠가 물망에 올랐지만, 두 사람 모두 거절했다. 결국, 당시 물리학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제임스 맥스웰이 캐번디시 연구소의 첫 번째 소장이 되었다. 그는 1873년에 <전기와 자기에 관한 논문>으로 전자기학 이론을 완성하면서 전자기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장이 된 지 6년 만에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79년 말, 그 뒤를 이어 레일리 경이 두 번째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러나 5년 후에 영국 과학 발전 협회 회장이 되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은 놀랍게도 서른이 채 되지 않았던 조지프 존 톰슨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JJ(제이제이)’라고 불렀다. 그는 1884년부터 1919년까지 35년 동안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다. 최초로 전자를 발견한 뛰어난 물리학자이기도 했지만,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실험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길러낸 선생이기도 했다.      


러더퍼드는 1919년 6월 초에 맨체스터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소장이 되어 돌아왔다. 1895년에 고향이었던 뉴질랜드를 떠나 이곳으로 왔고, 

어니스트 러더퍼드. 20세기 초 핵물리학의 문을 연 실험물리학자.

1898년에 맥길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캐나다로 떠났다. 그리고 1907년에 맨체스터대학교에 와서 원자의 비밀을 밝혀냈고, 그 깊숙한 곳에 원자핵이 숨어있음을 알아냈다. 

그리고 1919년, 24년 만에 러더퍼드는 그가 처음 핵물리학을 시작한 곳으로 되돌아왔다. 캐번디시 연구소는 러더퍼드가 소장이 되면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핵물리학의 메카로 자리를 잡는다. 러더퍼드는 맨체스터대학에서 캐번디시 연구소로 오면서 그의 학생이었던 제임스 채드윅을 데리고 왔다. 채드윅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1932년에 중성자를 발견하면서 193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다. 채드윅뿐만 아니라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에게 배운 제자 중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사람들은 제법 많았다. 패트릭 블래킷, 표트르 카피차, 존 콕크로프트와 어니스트 월턴, 에드워드 애플턴은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러더퍼드의 제자들이었다.     

마스덴의 실험

러더퍼드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하고 싶은 실험이 있었다. 그건 오래된 연금술사들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어떤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꾸는 것. 연금술사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다스처럼 어떤 원소든지 손만 대면 금으로 바꿀 수 있길 갈망했다. 러더퍼드 전에 원소를 다른 원소로 바꾸는 일에 성공한 연금술사는 없었다. 어떤 원소를 금으로 바꾸려면 우선 원자 속에 들어있는 원자핵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원자핵이 다른 핵으로 바뀌려면 양성자나 알파 입자 또는 다른 원자핵과 부딪히는 핵반응이 일어나야 했다. 러더퍼드가 캐번디시 연구소로 온 그해에 러더퍼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오랫동안 연금술사들이 꿈꾸던 일을 실현한다. 그것은 인공적으로 원자핵을 다른 핵으로 변환시키는 일이었다.          

어니스트 마스덴

어떤 만남은 자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그런 만남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한 만남이 한 사람의 생애를 바꿔놓는다. 어니스트 마스덴과 러더퍼드의 만남이 그랬다. 마스덴은 맨체스터에서 북서쪽으로 3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랭커셔 지역의 작은 도시 블랙번 출신이었다. 고등학교 때 만난 물리 선생 덕분에 그는 전기 현상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에게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라고 권한 사람도 물리 선생이었다. 마스덴은 그 조언대로 1906년 10월에 맨체스터대학에 입학했다. 그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07년, 맥길대학교에 있던 러더퍼드가 은퇴한 물리학과 교수 아서 슈스터의 뒤를 이어 맨체스터대학으로 왔다. 마스덴은 러더퍼드의 강의를 들으면서 방사선에 깊이 매료되었다. 학부생이었지만, 이미 기상학과 대기 중에 있는 전기를 연구하는 일에 조수로 참여했다. 그 연구로 학부생 때 벌써 논문을 두 편이나 출판하였지만, 그는 무엇보다 방사선 연구가 하고 싶었다.      

1909년, 학부 삼 학년일 때 마스덴은 러더퍼드의 조수였던 한스 가이거의 연구를 돕게 되었다. 러더퍼드는 마스덴에게 알파 입자를 얇은 금박과 충돌시키는 실험을 제안했다. 이미 일 년 전에 가이거가 했던 실험이었다. 가이거는 금박과 부딪힌 알파 입자 중에서 살짝 휘는 녀석들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러더퍼드와 가이거는 그런 현상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미 해본 실험이니 학부생이었던 마스덴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실험이라 여겼다. 며칠 후 가이거는 잔뜩 흥분한 채 러더퍼드에게 마스덴과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알렸다. 금박과 충돌한 알파 입자 중에서 반대로 되튀어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러더퍼드는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게 말이 돼? 알파 입자 8,000개 중에서 한 개 정도가 되튀어나온다고? 맙소사, 그건 화장지에 대포를 쐈더니, 대포알이 되튀어나온다는 말과 같잖아?”     

마스덴과 가이거의 실험은 원자 속 깊은 곳에 원자핵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전주였다. 러더퍼드는 일 년이 넘도록 이 실험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마침내 원자 속에는 딱딱한 그 무엇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딱딱한 그 무엇에 러더퍼드는 원자핵(Atomic nucleus)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 있으면서 마스덴은 대부분 여러 사람과 함께 연구하고 논문을 썼다. 1914년에 마스덴은 드디어 처음으로 자신이 계획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알파 입자가 수소 기체를 지날 때 알파 입자의 속력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긴 튜브에 수소 기체를 채운 다음에 알루미늄 박막으로 감싼 뒤에 라듐 C라고 불리던 비스무트 214 핵이 붕괴하면서 내놓는 알파 입자가 튜브 속으로 지나갈 수 있게 했다. 이 비스무트 214는 붉은색을 은은히 띠는 은백색의 금속이지만 베타 붕괴를 한 뒤 폴로늄 214로 바뀌었다. 이 베타 붕괴에서 나오는 전자는 전자석을 달아서 튜브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스무트 214 핵 중에서 아주 조금은 알파 붕괴를 하면서 탈륨으로 바뀐다. 이때 나오는 알파 입자를 실험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비스무트 214 방사성 물질은 자연에 존재하는 가속기였던 셈이다.      

마스덴은 튜브의 한쪽 끝에 아주 작은 창을 만들어 유리판에 황화아연을 얇게 바른 형광판을 달았다. 그리고 튜브에 들어있는 수소 기체의 압력을 조정할 수 있게 했다. 튜브 속 수소 기체의 압력이 낮을 때는 형광판까지 도달해서 불꽃을 일게 하는 알파 입자가 많았다. 마스덴은 이 불꽃을 현미경으로 세면서 알파 입자와 수소 핵의 충돌을 관찰했다. 그러나 수소 기체의 압력을 계속 증가시키자 알파 입자는 수소 핵과 더 많이 충돌하면서 속력을 잃었고, 마침내 형광판까지 도달하는 알파 입자는 발견되지 않았다. 여기까지는 마스덴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알파 입자의 속력을 줄이려고 형광판에 앞에 여러 종류의 금속 박막을 대고 실험했다. 그리고 파라핀 왁스를 바른 박막도 대어 봤더니, 거기서 수소 핵(양성자)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러더퍼드의 추측

마스덴이 실험할 즈음, 러더퍼드는 원자핵에 알파 입자나 양성자를 충돌시키면 원자핵이 다른 핵으로 변하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1914년 4월에 워싱턴에 있는 국립 과학 아카데미에서 “물질의 구성과 원소의 진화”라는 제목으로 강의했다. 거기서 이런 말을 했다.     

“새로운 원자를 만들려면 원자핵에 수소 핵이나 헬륨 핵을 붙이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려면 원자핵에 가까이 다가갈 만큼 수소 핵이나 헬륨 핵의 속력이 충분히 커야 합니다. 그러면 핵이 붕괴하거나 합쳐져서 다른 핵이 될 것입니다.”     

이 말처럼 러더퍼드는 마스덴이 했던 대로 단순히 알파 입자가 기체와 충돌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았다. 그는 마스덴이 지나가는 투로 논문에 남긴 말에 신경이 쓰였다. 

“파라핀 왁스와 알파 입자가 충돌하자 양성자(수소 핵)가 튀어나왔다.”

어쩌면 알파 입자와 파라핀 왁스 속에 있는 원소와 핵반응이 일어나면서 원자핵에서 양성자가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러더퍼드는 마스덴에게 자신이 실험을 이어서 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마스덴은 흔쾌히 허락했다. 한때는 자기 학생이었지만, 이제는 동료로 성장한 사람을 거기에 걸맞게 대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러더퍼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도 없었다. 그가 맥길대학교에 있으면서 가르쳤던 첫 제자는 여자였다, 게다가 한때 제자였다고 막 대하는 법도 없었다. 러더퍼드는 마스덴을 오롯이 동료로 대우했다. 마스덴의 허락을 받은 뒤, 그는 실험을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실험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러더퍼드 역시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일을 해야만 했다. 러더퍼드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즈음,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실험을 재개했다.      

1919년 6월, 러더퍼드는 캐번디시 소장이 되어 무척 바빴지만, 바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 핵반응 실험을 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보다 더 힘든 일은 형광판에서 이는 불꽃을 사람 눈으로 일일이 확인해야만 했는데, 형광판에 양성자나 알파 입자가 충돌하여 불꽃을 일으킬 때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를 잡아낼 수 있어야 했다. 결국, 실험하는 사람의 경험이 중요했다. 러더퍼드가 무슨 발견을 했는지 말하기 전에 우선 그가 이 실험을 어떻게 했는지 잠시 살펴보자. 1919년 6월, 러더퍼드는 출판한 논문에 측정 방법을 자세히 적어놓았다.     

“이 실험에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방사선원과 실험 장치를 조정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형광판에 이는 불꽃을 계수한다. 불꽃을 세기 전에 관찰자는 암실에 들어가 30분 동안 눈을 편안히 쉬게 한다. 그리고 계수하는 동안 약한 불빛 외에는 다른 빛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실험은 암실에 있는 어두운 실험실 안에서 한다. 실험 장치를 조정할 때만 불을 켠다. 불꽃은 1분 동안 계수한 뒤, 같은 시간 동안 쉰다. 시간과 데이터는 조수가 기록한다. 일반적으로 한 시간 정도 불꽃을 세고 나면 눈이 피로해지므로 계속 측정하면, 결과가 틀리게 되고 신뢰할 수 없게 된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 불꽃을 계수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일주일에 서너 번만 하는 게 좋다.”     

결국 사람의 눈이 검출기였다. 실험에 성공하려면 측정하는 사람의 눈보다 귀한 건 없었다. 그건 그냥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눈이야말로 실험에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검출기였다. 한 번은 마스덴과 가이거가 함께 기차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오랜만의 기차 여행에 젊은 마스덴은 마음이 들떴다. 그는 차창 바깥의 경치가 참 아름다워서 창문을 열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가이거는 급히 마스덴을 자리로 끌어 앉히며 엄하게 말했다.      

“어니스트! 조심해야 해.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꽁초라도 던지면 네 눈이 상할 수 있어. 눈이 상하면,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잖아!”      

마스덴의 눈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귀하게 다루는 검출기나 다름없었다. 실험물리학자라면, 눈이야말로 가장 신경 써서 보호해야만 했다. 눈을 다친다는 것은 검출기가 망가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인공 핵변환

러더퍼드가 만든 실험 장치는 마스덴이 쓰던 것보다 정교했다. 이 실험 장치는 간단했지만, 거기서 관측된 결과는 원자핵의 이해를 통째로 바꿀 만큼 놀라웠다. 러더퍼드는 우선 마스덴이 한 실험을 반복했다. 튜브 안에 이산화탄소를 채워 넣고 거기에 알파 입자를 지나가게 했다. 결과는 마스덴이 얻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산소 기체를 튜브에 채워 넣고 실험을 해봤지만 특별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튜브 안에 공기를 채워 넣었다. 공기는 대부분 질소와 산소가 섞여 있는 것이니 알파 입자는 질소 아니면 산소와 충돌할 게 분명했다. 러더퍼드는 마음을 가다듬고 현미경으로 형광판을 유심히 관찰했다. 형광판에 불꽃이 일었다. 그는 형광판의 불꽃이 수소 원자 때문인지 헬륨 핵 때문인지 구분할 줄 알았다. 이 둘을 구분하는 건 오직 실험을 많이 해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일종의 비법이었다. 그는 형광판을 보며 깜짝 놀랐다. 형광판에 부딪히는 건 알파 입자가 아니라 수소 핵이었다. 실험이 끝난 뒤 곰곰이 생각해봤다. 알파 입자가 산소 기체 속을 지날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공기 중에 있는 산소도 이와 마찬가지로 알파 입자와 충돌해봐야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알파 입자와 충돌한 질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좀 더 정확하게 확인해야만 했다.      

러더퍼드는 다시 실험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튜브 속에 질소 기체를 채워 넣고, 비스무트 214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를 튜브 속으로 지나가게 했다. 현미경으로 형광판을 들여다봤다. 형광판에서는 여기저기서 불꽃이 튀었다. 수소 핵 때문에 이는 불꽃이었다. 도대체 튜브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수소는 양성자와 전자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니 수소 핵은 바로 양성자였다. 이건 알파 입자와 질소 핵이 충돌하면서 질소 핵 안에 있던 양성자가 바깥으로 튀어나온 게 틀림없었다. 양성자를 하나 내뱉은 질소 핵은 무엇으로 바뀌었을까? 러더퍼드는 질소 핵이 탄소 핵의 동위원소로 바뀌었으리라 추측했다. 이 생각은 얼핏 타당해 보였다. 질소에서 양성자 하나가 튀어 나갔으니, 남은 양성자 수는 여섯밖에 안 남았을 것이고, 양성자가 여섯 개 들어있는 핵은 탄소 핵이었다. 그러나 질소 핵이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알려면 알파 입자와 질소 핵이 충돌한 뒤에 나오는 모든 입자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질소 핵과 충돌한 알파 입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알파 입자는 질소와 합쳐지면서 양성자 하나를 내놓은 뒤, 질소보다 더 무거운 산소 핵을 만들어냈다. 이 산소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산소의 동위원소였다. 러더퍼드의 이 실험은 역사적인 도약이었다. 연금술사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일을 러더퍼드가 해낸 것이었다. 무거운 핵이 다른 핵으로 붕괴한다는 사실은 이미 러더퍼드가 캐나다 맥길대학교에 있으면서 프레더릭 소디와 함께 알아냈지만, 어떤 핵에 알파 입자를 충돌시켜서 새로운 핵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러더퍼드는 핵물리학이라는 학문의 문을 이미 오래전에 연 사람이었다. 이제 알파 입자를 사용해서 새로운 핵을 만들어내는 일도 했으니, 오늘날 핵반응이라고 부르는 핵물리학의 한 분야도 1919년 러더퍼드의 손에 탄생하였다. 러더퍼드가 알아낸 핵변환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맨체스터에 있으면서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했던 닐스 보어는 유럽 물리학자들이 당신이 얻은 결과밖에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며 영국 밖의 분위기를 전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볼프강 파울리의 스승이었던 아르놀트 조머펠트도 러더퍼드의 실험 결과에 한껏 고무되어 자신이 쓰고 있던 책 <원자구조와 스펙트럼선> 뒷부분에 러더퍼드가 발견한 사실을 집어넣었다.      

러더퍼드는 채드윅과 함께 비슷한 실험을 재개했다. 좀 더 정교하게 측정하려고 실험 장비를 새로 제작했다. 양성자가 형광판에 부딪히며 내는 빛은 현미경으로 집중해서 봐도 무척 희미하였다. 그래서 애덤 힐거 광학 회사에서 제작한 현미경을 새로 사들였다. 이걸 사용하면 기존에 쓰던 것보다 알파 입자나 양성자가 황화아연 형광판에 부딪히면서 나오는 빛을 훨씬 잘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러더퍼드가 1919년에 측정했던 양성자가 질소에서부터 튀어나오는 것임을 확신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에 이 양성자가 기체 속에 있는 수소에서 온 것이라면 측정된 것보다 가는 거리가 더 짧아서 형광판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황화아연 형광판에 부딪히며 빛을 내는 입자가 질소에서 온 양성자임을 확신하였다. 이 양성자는 질소에서 온 게 분명하였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다른 원소에서도 인공 핵변환이 일어나는지 꼼꼼하게 확인하였다. 붕소, 불소, 나트륨, 알루미늄, 인에 알파 입자를 쏘아주었을 때도 양성자가 튀어나왔다. 알루미늄에 알파 입자를 쏘아주었을 때는 훨씬 더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다. 튀어나오는 양성자의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심지어 알파 입자와 반대 방향으로도 양성자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리튬, 베릴륨, 탄소, 산소, 규소, 황에 알파 입자로 때렸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칼슘, 니켈, 구리, 아연, 은과 같이 무거운 핵은 거기에 알파 입자를 때려주어도 양성자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러더퍼드와 채드윅은 비스무트 214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의 에너지로는 이렇게 무거운 핵에서 양성자를 끄집어낼 수 없다고 여겼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무거운 핵일수록 전하수도 커졌다. 알루미늄만 해도 전하수가 13이나 되었다. 전하수가 이보다 더 크면 전하가 2인 알파 입자와 무거운 핵은 서로 강하게 밀친다. 알파 입자가 이 척력을 이겨내고 무거운 핵과 충돌하려면 에너지가 더 커야만 했다. 비스무트 214에서 나오는 알파 입자의 에너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원자의 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핵이 놓여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뱅글뱅글 돌고 있다는 게 러더퍼드의 모형이었다. 이번에는 핵이 알파 입자와 충돌해서 다른 핵으로 바뀌는 과정을 고찰하면서 자신이 세운 원자 모형과 비슷한 핵 모형을 제안했다. 그는 이 모형을 위성 모형(satellite model)이라고 불렀는데 핵 주위를 양성자가 돌고 있다고 가정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타당한 제안처럼 보였다. 이 양성자가 알파 입자와 충돌해서 핵 바깥으로 튕겨 나간다고 가정하면, 러더퍼드와 채드윅이 얻은 실험 결과를 얼추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나오고 나서도 한참 뒤에나 알게 되지만, 핵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강력이라는 새로운 힘이고, 핵의 구조 역시 양자역학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러더퍼드의 핵 모형은 그저 피상적인 모형일 뿐이었다. 강력의 지배를 받는 핵의 모습이 전자기력의 영향 아래 있는 원자와 같을 수는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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