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 방에 대하여
우선 이 방이 얼마나 복잡해졌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쏘그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저자 에릭 와이너는 채워지지 않는 지적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지하방에 갔다가 1926년 윌 듀런트의 책 <철학이야기>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왜 방귀가 나올까>와 <바보들을 위한 자산 관리> 사이에 낀’이런 문장은 너무나 마음에 든다. 바로 내 방을 묘사해 주기 때문이다. 이 방에도 수 백권의 책이 꽂혀 있다. 그리고 섞여있다. <우리꽃 백가지2> 책 옆에 <그림책의 이해2> 사이에 로버트 번즈의 <올드 랭 사이>시집이 꽂혀 있다. 읽어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책들이 더 많다. 책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재료이기 전에는 각자의 이름이 있다. 고춧가루 젓갈 마늘 생강은 만나서 양념이 되고 배추에 버무릴 때 김치가 된다. 김치는 반찬이 되어 밥과 함께 흡수되고 끝내는 영양분이 되어 내 몸속에 흡수되어 나의 일부가 되어간다. 그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제목을 가진 책들은 각자의 목적으로 읽히지만 내 안에 들어가서는 나의 지성과 지혜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감성은 책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이 방은 처음엔 우리 부부의 침실이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시어머니는 옆방을 정해 주셨다. 안 방 목욕탕이 사이에 있긴 하지만 방과 방 사이의 거리는 1미터도 채 안되었다. 만약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오면 거의 부딪힐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결혼을 1982년 12월 28일에 했고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난지 10개월만이었다. 중매결혼이었다. 남편은 1954생 말띠였고 나는 1960년생 쥐띠였다. 호적에는 1961생으로 올려져있지만 분명한 쥐띠였다.
처음 결혼했을 때 시댁은 본성동 주택이었다. 99평의 집은 윗채 아래채 커다란 장독대와 2층 창고집이 있었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2개나 세워져 있었고 3층집 높이만큼 크게 자란 히말라야싯다가 세 그루가 옆 집 담장 사이에 심어져 있었다. 철제 대문은 옥색 페이트칠이 되어 있었고 장독간이 있는 뒤뜰은 세멘트 바닥으로 넓었다. 2층 창고에는 몇 번 가보지 않았지만 그 창고에는 책들이 흩어져 있던 기억이 난다. 35년이 훌쩍 넘었다. 84년생 첫 아이가 태어나고 돌을 지낸 후 이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처음엔 1층에 전세를 들어살다가 1년 만에 2층인 이 집으로 옮겼다. 1층 살 때도 이방 옮긴 후에도 이 방이었다.
같이 살 던 시어머니는 자다가도 이 방문을 벌컥벌컥 여셨기 때문에 나는 잠옷을 한 번도 입지 않고 잠이 드는 버릇이 생겼다. 어릴 때도 입던 옷 그대로 잤으니까 뭐 그렇게 심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시누이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사용하던 침대가 아깝다고 친정으로 내려보냈다. 옷장과 함께 왔다. 그 옷장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침대가 들어오면서 지금 사용하는 방으로 옮긴 것 같다. 큰 붙방이장이 있고 붙박이장 안쪽은 엘리베이터 옆이라 가끔 쌔한 바람을 느낄 때가 있다. 빈 공간이 주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방이다. 지금도 붙박이장 옆에서 자는 날이면 코가 막막해진다.
이 방은 한 동안 딸 아이들 방이었다. 세 살 터울인 두 딸은 이방에서 학창시정르 보내고 대학생이 되자 서울로 갔다. 아들은 우리 방 건너 북쪽으로 난 방을 썼다. 방 4개 중에서 창문이 바로 바깥과 연결된 방이었다. 지금은 옷 방으로 쓰고 있다. 그 방도 거의 창고 수준이 되었다.
이 방은 주제가 넘치는 문장같다.
이 방은 처음엔 책과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아이들이 학생식절 보던 책과 교과서 내가 꾸준히 받아보던 계간지 <문학과 사상>은 이미 베란다 뒤주안이나 궤짝안에 보관하다가 처분하였다. 어느 해 헌 책을 한 트럭 이상 내 놓았지만 집안의 책은 줄어든 느낌이 없었다. 2000년대부터 김언희 선생님께 시를 공부하러 다닌 후부터 더욱 책은 늘기 시작해서 원래 있던 책과 함게 부피를 늘려갔다. 습작노트도 여러 권이 된다. 죽은 후 박물관을 지을 것도 아닌데 습작노트는 나의 생각과 필사의 흔적, 일기와 함께 책꽂이 한 부분을 차지히고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교 졸업 하기까지 쓴 일기는 친정 집에 두고 왔다가 가져오지 못했다. 이사를 두 번 더 한 후 친정집에 내 일기장 묶음이 드디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기록을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다.
언젠가 펼쳐놓고 읽고 싶어서이다. 메모와 스크랩은 시아버지의 일상이었다. 십 년 전에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떻게 처리하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으면 시아버지의 일기장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나는 2년을 근무한 후 퇴직하였다. 며느리가 직장생활 하는 것은 집안의 수치라 여기던 당시의 관념 때문이었다.나는 아무 판단도 없이 어떤 갈등이 찾아 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한 집에서의 탈출 수단으로 한 집을 택하여 이동하였다.
2년을 근무한 것은 시아버지께서 사람 인생이 어찌될지 모르니 교원자격증은 살려놓자는 뜻 때문이었다. 휴직 3년 이상이 지나면 교사자격증이 상실되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2년을 근무하면 다시 교사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 때 소량의 퇴직금이 나왔다. 퇴직금 문제는 16년 2000년도에 임용고시를 통하여 다시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후 퇴직금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전에 받은 퇴직금을 반환하면 새로 시작한 연금에누적해 준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나는 전혀 돈을 취득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 시어머님께 퇴직금을 돌려주시라고 요청했다. 시어머니는 퇴직금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시아버지의 오래 된 일기장을 뒤적여 당시의 기록을 찾아냈다.
일기장에는 ‘며느리 퇴직금을 내자가 처리했다’라고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시아버지의 메모 덕을 본 셈이다.
이 방은 지금은 창고가 되었다. 책과 여러 개의 여행 가방 그리고 서울서 데려온 고양이 복이의 식량과 용품 창고다. 내가 공부한 책들과 국어교육학, 한국어교육학대학원 때 공부한 책과 자료가 아직 쌓여있고 등단지 시와 세계의 계간지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진주교육대학교 출강에 필요한 자료 또한 한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독서 동아리에서 읽어야 할 책들이 내 옆을 둘러싸고 있다. 독서하지 않으면 집중하지 않으면 사고의 줄이 날아가 버린다.
내 시의 마중물은 독서다. 독서를 통한 깨달음은 삶의 체험만큼 중요한 나의 자양분이다. 어떻게 집중할지 고민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과제이다.
아침에 <쏘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펼치자마자 할 말이 많아져서 이 글을 썼다. 시작할 때는 방을 펼쳐보고 정리하겠다는 결심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잠깐 동안 그 생각이 바뀌었다. 많은 물건이 나를 포위하고 있지만 절실한 것은 책 읽는 것이다. 어제 <힐빌리의 노래>를 다 읽고 오늘부턴 <쏘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다음엔 <케이크와 맥주> 이렇게 책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아껴서 책을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참기름 짜기, 물김치 담기, 남은 생강 처리하기, 서울에서 달리전 보기 등이 있다.
그런데 3만원 어치의 생강을 버리더라도 나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깊다 이 순간에는 이 방에서 나는 공부하고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있다. 다행히 이 방은 넓어서 딸이 보내준 청소기가 책장에 기대어 서 있긴 하지만 서너 사람은 잘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다.
지난 가을엔 시화전에 참여하였다. 천상병 지리산 시화전, 진주문협 시화전, 진주예총 시화전 세 군데이다. 예총에 냈던 시화전 제목이 “딴짓‘이다. 나는 늘 딴짓을 하고 있다. 딴짓은 늘 진짜 해야할 일을 염두에 두고 있다.
나의 문제는 늘 딴짓이라는 느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