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인도양 장악은 그야말로 현기증 날 정도로 빨리 진행되었다.
1498년 인도에 도착한 포르투갈은 1510년에는 인도 고아까지 점령해 버렸다. 이제 포르투갈의 눈길은 말라카(現 말레이시아의 도시, 말레이반도 서해안 남쪽에 위치.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 사이에 있음)로 향했다. 아시아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물리치고, 이슬람 세력까지 굴복시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말라카는 인도와 명나라의 중간이라는 최적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아랍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버마인, 벵골인, 샴(태국)인, 필리핀인, 페구안인 등이 몰려와 각자의 상인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다.
얼마나 번창했는지 훗날 한 포르투갈 여행자의 기록에 의하면 말라카에서 사용되는 언어만 무려 84개라는 것이었다! 인구도 많아서 4만 명에 이르렀고, 도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만일 말라카만 정복할 수 있다면, 포르투갈로선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는 격이었다.
그렇게 해서 1508년 4월, 마누엘 왕의 명령을 받은 디오고 로페즈 데 스퀘이라는 4척의 배를 이끌고 말라카로 가게 됐다.
1년 5개월 후인 1509년 9월, 스퀘이라의 원정대는 말라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간에 마다가스카르 지도도 그려야 했기 때문에 조금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그렇긴 해도 스퀘이라는 말라카의 술탄 마흐무드 샤와 성공적으로 협상해 페이토리아(교역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구자라트와 자바의 모슬렘 상인들에게 모함과 공격을 받고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탈출하지 못한 포르투갈인들은 그대로 도시에 억류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인도 총독인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직접 군을 이끌고 말라카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야심만만한 자로 반드시 말라카를 정복하기 위해 여러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이후 인도양을 횡단한 알부케르크의 함대는 1511년 7월 1일에 말라카에 도착했다. 알부케르크는 이전에 도시에 억류된 포로들을 풀어달라고 마흐무드 샤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7월 중순, 포르투갈은 전쟁을 결정했다. 곧바로 도시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말라카의 저항은 격렬했고, 군량이 모자란 알부케르크는 일단 군을 물리기로 했다.
군을 재정비한 포르투갈군은 8월 8일 아침, 포격을 시작으로 두 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말라카군도 대포를 갖고 있긴 했으나 구식이라 사정거리가 짧았고, 병사들은 열병기를 다루는데 서툴렀다. 결국 말라카군은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포르투갈군은 차츰차츰 교두보를 점령해 나갔다. 이런 식의 전투는 보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마침내 8월 24일 정오, 술탄의 마지막 부대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알부케르크는 도시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400명의 병력을 지휘하면서 이날 늦게까지 남은 저항군을 제거해 나갔다.
소탕 작전은 8일이 걸렸다. 더 이상 포르투갈에 대항할 수 없게 된 마흐무드 샤는 왕실의 보물과 남은 군대를 모아 정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복에 성공한 포르투갈 병사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엄청난 포상금을 받았다.
1512년 1월, 알부케르크는 말라카를 떠났다. 그가 떠난 직후, 마흐무드 샤는 곧바로 말라카를 수복하기 위해 공격했다. 하지만 포르투갈군은 강했고, 결국 샤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1527년 사망할 때까지 마흐무드 샤는 수마트라 캄파르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었다. 그의 아들 알로딘은 말레이반도 끝에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다.
포르투갈은 이후 1641년 네덜란드에게 이 도시를 빼앗길 때까지 장장 130년에 걸쳐 식민 통치를 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은 우리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제 이들이 명나라 오문(마카오)까지 올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한 셈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전래한 불랑기포와 조총이 훗날 임진왜란의 주요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손쉽게’ 말라카를 정복한 포르투갈의 관심사는 이제 저 거대한 제국인 명나라로 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