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막, 요르단에서 살아가기 위한 안내서
요르단의 인구는 약 1,100만 명이며, 이 중 아랍인이 98% 기타 인종이 2%를 차지한다. 아랍인 가운데는 팔레스타인계가 60% 요르단계가 40%로 구성되어 있으며, 팔레스타인인은 주로 이스라엘 지역에서 전쟁과 갈등을 피해 넘어온 난민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특히 이들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전부터 요르단에 정착해 살아왔다. 요르단 법률 제6호에 따르면, 이들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1948년 5월 15일 이전에 팔레스타인 국적을 소지하고, 1949년 12월 20일과 1954년 2월 16일 사이에 요르단에 정규 거주자였던 사람”으로 정의된다(현재 진행되고 있는 가자지구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은 포함이 되지 않는다)
요르단계는 이 지역의 원주민과 베두인들을 포함하며, 지금도 정치와 군대, 공공기관 등에서 높은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 소수민족으로는 아르메니아인과 체르케스인이 각각 약 1%씩 존재하며, 이들은 독자적인 문화와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요르단에서 생활하며 만난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출신이었다. 나에게 언제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Dr. Shubi 역시 팔레스타인계다. 그는 대학의 토목공학 교수이며, 가족과 함께 암만 인근 마다바 지역에 거주한다. 그의 가족은 1967년 이전 예루살렘에서 이주해 왔으며, 요르단에서 정착한 이후 아버지는 전기기술자로 일했고, 그는 요르단의 서울대로 불리는 요르단 대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유학과 교수 생활을 했다.
Shubi 교수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예루살렘을 조상의 고향으로 여기며, 지금도 그 땅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은 요르단이지만, 마음속 고향은 팔레스타인에 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요르단에 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이처럼 요르단에서 태어나고 자란 팔레스타인인들이 스스로를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단순한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였다. 나 역시 처음엔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들이 고향이라고 부르는 땅이 지금의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르단에서는 이 정체성 문제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볼 때 선수의 출신이 팔레스타인이라고 말하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또 요르단 국왕 압둘라 2세의 아내인 라니아 왕비도 팔레스타인 출신으로, 왕실조차도 민족 화합의 상징으로 이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
팔레스타인계는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지만, 정치적 대표성은 낮다. 상원 55석 중 9석, 하원 110석 중 18석만이 그들의 몫이며, 12개 자치주 중 그들이 주도하는 주는 없다. 군대나 공공기관에서의 고위직 진출도 제한적이며,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이주 시기에 따라 거주증의 형태도 다르며, 일부는 매년 갱신이 필요한 임시 거주 상태에 놓여 있다.
요르단 곳곳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정착촌이 존재한다. 그중 바카 캠프는 처음에는 단순한 임시 텐트촌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하나의 소도시로 성장했다. 황무지에서 삶을 개척한 그들의 모습은 한국의 실향민들과 닮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이 주인이 아닌 땅에 살고 있다는 감정을 지우지 못한다.
한 유엔 난민구호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아랍 국가들은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를 정치적 무기로 삼기를 원한다. 난민들이 죽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 말은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그들의 고향은 사라졌고, 그들의 나라는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르단에는 체르케스 사람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탄압과 집단학살을 피해 중동으로 강제 이주된 무슬림 집단이다. 처음에는 자르카 지역에 정착했으나, 피부색이 하얗고 아랍어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유대인으로 오해받아 공격을 당했다. 이후 요르단 왕실의 개입으로 아즈락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때의 보답인지 현재까지 체르케스 인들은 요르단 왕실의 경호를 하고 있다.
아즈락은 커다란 오아시스와 습지를 품고 있는 도시로 아랍어로 ‘파란색’을 뜻하며, 체르케스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주변 국가인 이라크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일부는 고향의 땅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귀향은 더욱 어려워졌고, 세대를 거치며 많은 체르케스 후손들은 모국의 언어도 잊게 되었다.
세계테마기행 촬영을 통해 체르케스 마을을 방문했을 때, 따뜻하고 유쾌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가정의 벽에는 흑백사진 속 젊은 조부모의 모습이 인상 깊게 걸려 있었고, 가족의 역사는 그들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손자는 더 이상 체르케스어를 하지 못했다. 문화는 남아 있지만, 언어와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요르단은 작지만 다양한 민족과 이야기를 품은 나라다. 팔레스타인인, 체르케스인, 그리고 다양한 뿌리를 지닌 사람들은 이 땅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잊히지 않는 고향과 정체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수치로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삶과 역사 속에는, 지금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이야기들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