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사막, 요르단에서 살아가기 위한 안내서
아직도 기억난다. 처음 요르단에 도착했을 때,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국적인 풍경이나 현란한 시장도, 사막의 낙타도 아니었다. 형태는 없지만 바로 모스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잔 소리였다. 도시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이슬람 기도 소리는 하루 다섯 번, 마치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리듬을 가지고 요르단의 하루를 이끌었다. 그 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사를 멈추고, 대화를 멈추고, 길을 멈추고, 하늘을 향한 기도의 준비에 들어갔다. 어떻게 아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모두가, 똑같이 메카를 향했다.
그 기도의 순간은 혼자일 수도, 수백 명이 함께일 수도 있지만 그들이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아 절을 올릴 때, 그들이 서 있는 방향은 언제나 같았다. 메카. 사우디아라비아의 작은 도시이자, 무슬림들에게는 가장 신성한 장소. 요르단에서 나는 방향이 하나의 문화이자 신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매일 실감했다.
아랍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나의 아랍어 선생님은 항상 가방 속에 나침반을 넣고 다녔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곧 알게 되었다. 어디에 있든, 기도의 방향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였다. 요르단뿐 아니라 중동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스마트폰에는 메카 방향을 알려주는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되어 있었다. 기술과 신앙이 이렇게까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곳, 그것이 요르단이었다.
이슬람은 요르단의 국교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 정해진 시간에 메카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단순한 기도라기보다는 하나의 ‘삶의 리듬’이다. "파즈르(Fajr), 주흐르(Dhuhr), 아스르(Asr), 마그립(Maghrib), 이샤(Isha)" 하루 다섯 번의 예배. 해뜨기 전부터 밤까지, 하루를 시간으로 쪼개어 신과 만나는 순간들을 만든다. 상황에 따라 이들을 합쳐서 드릴 수도 있지만, 가능한 한 시간에 맞춰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그리고 이 모든 예배는 정결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모스크 앞에는 늘 ‘우두(wudu)’를 위한 세정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손, 입, 코, 얼굴, 팔, 머리, 귀, 발을 오른쪽부터 세 번씩 씻는 이 의식은 단순한 위생이 아닌, 마음과 몸을 정비하는 준비다. 어떤 경우에는 ‘구슬(ghusl)’이라 불리는 전신 목욕도 필요하다. 더 이상 물이 없을 때는 흙이나 돌, 모래로 대신하는 ‘따이얌뭄(tayammum)’이라는 대체 방식까지 존재한다. 이 모든 행위가 ‘예배’를 위한 준비라는 사실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가 함께 일했던 무슬림 동료, Dr. Shubi는 그런 신앙심을 매일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시험 감독을 하다가도, 사무실에서 바쁘게 문서를 정리하다가도, 그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회의 도중 자리를 살짝 빠져나가 조용히 기도하러 가는 그의 뒷모습에는 어떤 당당함이 있었다. 한 번은 길을 가다 휴게소에서 잠시 멈췄을 때, 그는 가장 먼저 주변을 둘러보며 기도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 그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메카를 향했고, 그 침묵 속에는 강한 믿음이 서려 있었다.
이따금 나는 그가 정결 의식 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물을 떠 손을 씻고, 입과 코를 헹군 뒤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는 그의 움직임은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정제되어 있었다. 반복되는 행위이지만 결코 기계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번 그 안에는 마음을 다잡는 집중이 있었다. 그가 예배에 들이는 시간은 아주 짧을 수도, 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소음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신념이 만든 습관, 그것이 그들의 예배였다.
한국에서 저녁 풍경을 보면 도시의 어둠 속에 붉은 십자가가 번쩍이며 빛난다. 교회의 상징. 하지만 요르단의 저녁엔 그 대신 초록색 초승달 모양의 네온사인이 거리를 밝힌다. 그것은 모스크의 상징이며, 누군가가 그 안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젠 그 불빛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인간이 신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달라도, 마음을 담는 진심은 결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요르단에서의 삶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단순히 언어나 문화만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어떤 경건함을 배우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배는 의무이자 권리이며, 동시에 삶 그 자체였다.
이슬람에 대해, 무슬림에 대해, 나는 이제 감히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메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종종 생각한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시대는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 이슬람 국가인 요르단에서도 모두가 신실한 것은 아니다. 정해진 시간마다 기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이들도 있다. 누구나 같은 방향을 향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마음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는 신실하게 메카를 향하고, 또 다른 이는 다른 방향을 바라본다. 그 어디나 그렇듯,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에서 멀어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다양함조차,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처럼 보인다. 정결하게 몸을 씻고 조용히 기도하는 이들 곁에,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다. 신실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그 차이는 단지 기도 여부로만 나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의 태도’를 선택하느냐에 관한 문제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가 아니라, 자신이 믿는 바를 향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Dr. Shubi처럼, 어떤 이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만의 방향을 지켜간다. 반면 어떤 이는 방향을 잃기도 하고, 스스로의 기준을 새롭게 만들기도 한다. 그 모든 선택 앞에서,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신앙이란 흔들리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다시 찾으려는 마음 그 자체라는 것을.
그들은 매일 메카를 향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다듬고, 삶을 정돈하며, 존재의 중심을 확인한다. 나 역시 그들의 삶을 지켜보며, 내 삶의 ‘메카’는 어디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시대가 바뀌어도, 세상이 변해도, 결국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방향을 찾고자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이 무엇이든, 진심을 담아 그 길을 향하는 마음만은 변하지 않기를 나 또한 그렇게 기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