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씩씩해. 정말~"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만남을 약속한 그 날 이모님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와 나를 보며 반갑게 웃으신다.
'씩씩하다는 이 말. 어디서 들었더라?'
간절했던 첫아이를 자연분만으로 낳고 회복이 다 되지도 않던 그 날밤부터 나는 모자 동 실을 선택해 아이가 원할 때마다 밤새 젖을 물렸다. 산부인과의 간호사님들은 첫애 엄마가 어쩜 이렇게 씩씩하냐며 감탄과 동시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엄마’라는 이름표를 처음 달았던 2011년 10월 14일부터 내 마음속에는 매 순간을 감당해내는 꿋꿋한 모정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거침없이 흘러 셋째를 낳고 다시 복직할 무렵 코로나 팬데믹이 닥쳤다. 그 시기와 맞물려 우리는 친정집 옆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주거지로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의 출근에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어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었고, 아이들이 다닐 초등학교가 코 닿을 데 있어 안심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공원이나 도서관, 마트 등을 다닐 수 있는 조용한 이 동네가 참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당장 아이들을 돌봐주실 이모님부터 찾아야 했다.
A4용지에 우리 가정의 환경과 근무 조건들을 작성해 아파트 관리실로 달려갔다. 비용을 지불하고 아파트의 동별 모든 게시판에 2주간 게시하도록 했다. 베이비시터 관련 앱들이 이미 전문화되어 있었지만 사람을 쓰는 일이다 보니 온라인상의 정보를 무조건 신뢰하기는 어려웠다. 아파트 입주민들 중에 분명 좋은 분이 나타날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딱히 연락이 오지 않아 애가 타고 있었다. 게시글을 붙이고 열흘쯤 되던 날 비행을 마치고 핸드폰을 열어보니 부재중 전화가 2건 있었다. 한 분은 단지 내의 어린이집 원장님이었는데 첫째 둘째의 하교 후 자신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간식을 먹고 숙제하며 부모님을 기다리면 어떨지 물어오셨다. 엄마가 집에 없는 날 아침 식사도 챙겨야 하는 우리 집 조건 사항을 보지 못하신 걸까? 고민할 것도 없이 정중히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또 하나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날 저녁 아파트 단지 안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핸드폰 번호를 저장했다. 카카오톡 친구가 되어 프로필 사진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다. ‘자제분이 둘이고 손주도 있으시구나.’ 사진 속 이모님의 모습은 참 밝고 선해 보이셨다. 나도 나름 항공사 승무원으로 20년 넘게 고객들을 상대하는 일을 했으니 사람 보는 눈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약속 장소에 들어서서 이모님의 첫인상을 본 순간 나는 속으로 외쳤다.
'더 찾을 것도 없겠어! 합격!'
이모님과 대화를 나누며 내 결정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때부터였다. 이모님께 세 아이들을 맡기고 비행하는 ‘다둥이 워킹맘 승무원’의 삶이 시작되었다. 잊고 지냈지만, 문득 떠올려보니 남편과 나는 이사와 함께 나의 항공사 사직을 의논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하는 것에도 적성이 잘 맞았기에 3남매와 알콩달콩 남편을 내조하는 전형적인 주부 생활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어린 세 아이들을 두고 친정의 도움 없이 장거리 비행을 다녀야 하는 승무원의 삶이 자신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라는 복병 덕분에(?) 항공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고 나는 드문드문 파트타임 수준의 업무를 유지하며 장기 휴직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 적게 일하며 아이들 챙길 시간이 충분하니 이보다 좋을 순 없구나~ 월급의 많고 적음은 중요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졌고, 식료품 이외의 돈은 쓸 일도 없었다. 나에게는 조용히 버텨내는 힘이 있어 코로나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아이들을 내 손으로 챙길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함이 커졌고, 이모님이라는 또 한 분의 든든한 지원군이 생겨 마음 편히 일할 수 있었다. 막둥이가 3살이었고 두 형제는 초등 3학년, 1학년이었던 시절이었으니 나에게는 참 중요하고도 어려운 순간 ‘은인’을 만난 것이었다.
코로나가 극성으로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던 그때 이모님은 마스크를 쓰고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다니며 출퇴근하는 나에게 전혀 싫은 내색도 불편한 기색도 보이지 않고 아이들에게 애정을 담아 살뜰히 챙겨주셨다. 아이들도 외할머니처럼 따뜻했던 이모님에게 마음을 열고 차분히 적응해갔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차곡차곡 쌓이며 거실에 설치해둔 CCTV의 전원도 빼버렸다.
그렇게 햇수로 6년이 흘렀다. 비행 업무의 강도와 양은 코로나 이전 수준보다 더 커졌고 이모님의 발목 부상 등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우리는 이모님을 보내드릴 수 없어 매번 근근히 버티며 기다렸다. 함께 한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고맙지 않았던 때는 없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되며 나와 내 가족 곁을 지켜주신 분이셨다.
"이모님, 사실 저희 다른 분 구해 볼 생각은 아예 안 하고 있어요. 남편이랑 저랑 둘이 더 부지런하게 아이들 챙겨 보자고 마음먹었거든요. 저희 너무 무모한 선택인가요? 하하하. 아이들도 이모님 덕분에 잘 자라주었고 집 안에서의 아이들 역할을 조금씩 더 늘리면서 함께 해내 보려고요. 두 애들은 중학생에 초등 고학년이라 문제없을 거고 초1 막둥이가 마음에 걸리긴 하는데 셋째고 여자아이라 오빠들 보며 눈치 키우고 배운 게 많아서 빠르고 독립적이네요~ 초등 돌봄교실도 너무 훌륭하고요. 힘들겠지만, 3개월만 딱 버텨보면 아이들도 적응할 거고 스스로 해야 할 일들 수행하면서 책임감도 더 커지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손주 보다가 지민이네 3남매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만 나와. 세 아이 모두 각자의 색깔이 뚜렷하면서 똑똑하고 야무져. 가족들을 위해 건강 스무디 만들어서 냉장고 채워 넣는 것도 일하는 엄마가 아무나 못 해. 요즘 사람 아니라고 내가 늘 남편한테 지민이 엄마 존경한다고 이야기한다니까. 그리고 아이들한테 나중에 훌륭한 사람 되어서 이모할머니 절대 잊으면 안 된다고 당부도 했네. 엄마 아빠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노력하는데 아이들이 다 부모 등 보고 배우는 거거든. 돌이켜보면 나도 애 아빠 명퇴하고 같이 장어가게 시작하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40대가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아이들 한창 챙기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어.
이 집은 엄마, 아빠의 씩씩 유전자가 아이들에게도 다 있어. 봄이가 3학년이었음 더 좋았겠지만, 지금부터도 잘 해낼거야. 아무튼 씩씩하다니까. 내가 항상 응원할거야.
아이들하고 헤어질 생각 하니 눈물이 나려고 하네. 그래도 동네에서 종종 보고 안부 전할게요. “
이모님의 따뜻한 응원을 가슴 한 켠에 채우고 진한 포옹을 나누며 커피숍을 나왔다.
나의 비행 가방에는 세 아이의 이름 스티커가 붙어있고, 업무용 테블릿의 바탕화면에는 다섯 식구 가족사진이 설정되어 있다. 처음 만나는 동료들도 내 비행 가방이나 테블릿을 보면 아이가 혹시 셋이냐고 놀라곤 한다. 전업주부를 희망하던 3남매 엄마는 코로나19와 은인을 만난 덕분에 ‘하늘을 나는 다둥이 워킹맘’이라는 ‘덤’으로 얻어진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비록 직장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내 직업에 대한 의미와 보람, 애정과 감사는 더 커질 수 있었다.
인생은 언제나 내가 마음먹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을 안고 항해하고 있었다. 낯선 상황에 처음 발을 디딜 때는 언제나 눈앞이 캄캄했지만, 생각과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꾸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고, 주위에 도와주는 좋은 사람들이 꼭 있었다. 나는 또 다른 인생의 챌린지를 시작한다. 이만큼 커 준 아이들과 함께 가정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하는 나의 반쪽 남편과 새롭게 쌓아가는 이 시간들이 우리 가족의 삶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줄 거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잠든 세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우리 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