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롭고 평화로웠던 마음이 분주하고 바쁘기만 하다. 일이 평소보다 손에 잡히지 않고,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이것저것 벌려두고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 불규칙하지만, 나만의 루틴이 있는 삶에 균열이 보이더니 일과가 조금씩 미세하게 무너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침부터 출근한 남편의 다급한 전화가 왔다. 나에게 전달한 카톡 메세지를 빨리 확인해 보란다. 모르는 번호로 온 가을이의 메세지가 부자연스럽다고 보이스피싱을 의심하는 듯했다. 화요일 아침 9시35분경. 이미 중학교는 1교시가 시작되었을 시간이었고, 아이가 남편에게 메세지를 보낸다는 건 가능성이 희박했다. 나도 그 상황이 의아해 교무실로 문의 전화를 걸었다.
학부모총회와 공개수업이 있던 3월의 어느 날 회사에 '가족 돌봄 휴가'를 쓰고 휴무를 받았다. 육아를 위한 제도적인 지원이 점점 늘고 있음을 실감하며 6학년 여름이의 공개수업을 참석했고, 나는 2년 전 그날이 다시 떠올랐다.
막둥이 봄이는 씩씩하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펑펑 내리는 눈으로 화이트 입학식을 맞이한 다음 날부터 워킹맘의 아이들이 모인 돌봄교실에서의 생활이 이어졌다. 안스러운 마음에 이른 하교를 시켜 간식이라도 챙기며 엄마와의 시간을 늘리려고 연차를 써두었지만, 딸아이의 마음은 정반대였다. 일찍 데리러 온 엄마를 원망하며 대성통곡을 하는 게 아닌가. 친구들과 돌봄교실에서 더 놀겠다는 고집을 말릴 수 없어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다시 돌봄교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섭섭함마저 밀려온다.
세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인 나에게 불어온 봄바람은 다름 아닌 '신학기 증후군'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과 스트레스는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마음속 불안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을 품고 동시에 많은 업무들의 부담감들이 몰려오던 3월의 내 일상들은 마치 성인 ADHD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리되지 못했다.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구름처럼 붕 뜬 채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 챙기기에 있어서 숨길 수 없는 완벽주의가 있었던 걸까? 그러기엔 나 스스로의 빈틈이 많아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저 바쁜 엄마로 살아가는 내가 3월 신학기만큼은 집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평온한' 모습으로 3남매의 학교생활을 돕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나 보다. 진짜 원하는 건 그저 믿고 지켜봐 주는 거라는 걸.
1학년 준비물 목록을 받아온 봄이는 고사리손으로 24색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비롯한 모든 물품에 스스로 이름표를 붙였다. 엄마가 해주어 줄이 반듯한 모습이 아닌 아이만의 힘으로 완성한 모습이 놀랍도록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는 빠진 게 없는지 다시 확인하는 꼼꼼함까지 보였다. 방과 후 수강할 과목들을 본인의 취향대로 고르고, 운동은 꼭 검도를 하겠다는 아이를 나는 그저 웃으며 지지해주었다.
2년 전 여름이는 형의 공개수업을 먼저 참관하고 뒤늦게 온 엄마를 원망하는 듯 내가 가장 싫어하는 목록에 1위는 엄마, 2위는 형을 써둔 채 엄마를 만나지도 않고 하교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시절 나는 공부 습관을 잡는다는 이유로 아이의 정서는 돌보지 않은 채 많이 부딪혔던 시기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여름이의 이번 공개수업 주제는 '내가 좋아하는 5가지'였다. 여름이의 취향을 알기에 2가지는 쉽게 맞출 수 있었다. 대망의 1위와 2위를 보며 나는 숨을 멈출 만큼 깊은 감사과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 2위는 우리 가족, 1위는 나 자신이라고 발표하는 여름이의 모습에 담임 선생님은 교실 뒤에 서 있는 나를 찾으셨다.
“여름이 부모님 오셨나요? 기분 좋으시죠? 정말 잘 키우셨습니다!”
2년 전 그날처럼 나는 학교 밖으로 나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름이와 나의 지난 시간 들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나, "안녕하세요. 2학년 윤가을 엄마에요. 다름이 아니고 아이 아빠에게 이상한 메세지가 와서 확인차 전화드립니다. 아이가 가정 선생님 폰을 빌려서 보냈다고 연락이 왔네요"
교무실 선생님, "아이의 반이 몇 반인가요? 현재 2학년들 1교시 수업 중인데, 가정 시간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사실 가을이의 메세지 내용은 이러했다.
아빠 나 윤가을인데 가정쌤 폰 빌려서 하는거야.
사랑해. 그리고 엄마 없을 때 챙겨줘서 고마워. 화이팅!
사춘기 아들의 사랑 표현이 어색한 우리 부부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이 상황을 의심했다. 그리고 실제 가정 수업 시간 부모님께 사랑을 전달하는 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핸드폰을 학교에 가져오지 않는 학생들만 선생님이 폰을 빌려주신 것이었다. 남편은 뒤늦게 사랑하는 가을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가을아 눈물 난다. 아빠가 고맙다. 가정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3월 분주한 신학기는 아이들과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나를 울고 웃게 했다. 3월의 길었던 연차들은 모두 끝나고 이제 다시 정상적인 비행 근무 패턴으로 돌아왔다. 나의 신학기 증후군도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하다.
장거리 비행을 가기 전 언제나처럼 냉장고에 건강한 식재료를 채우고, 대청소를 마친 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나만의 “하이라이트”를 포스트잇에 적어본다.
요즘 읽고 있는 <메이크타임> 책에 의하면 하이라이트의 선택은 오늘 무엇이 가장 빛나기를 바라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2025년 우리 가족 벚꽃 엔딩 즐기기
교문 앞에서 반가운 딸아이를 보며 힘껏 손을 흔든다.
하교하는 딸아이의 손에는 방과 후 교실에서 만든 작은 피자 박스가 들려있다.
“엄마, 나는 피자를 다 만들고 시간이 남아서 박스에 그림을 그렸어요. 이 핑크색 꽃은 벚꽃이야.”
“우와~ 엄마랑 마음이 통했네~ 우리 벚꽃비 맞으러 갈까?”
“좋아!”
우리는 교문을 나서고 바로 안양천으로 향한다.
유모차를 끌고 삼각대를 챙겨 온 어느 어린 부부의 모습에 살며시 나의 과거가 떠올라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부모님과 아이를 벚꽃 나무 앞에 세우고 진지하게 사진을 담는 어느 아이 아빠에게 먼저 손을 건넨다. “여기 다 같이 한번 서보세요. 제가 단체 사진 찍어드릴게요”
봄이와 손을 꼭 잡고 벚꽃 터널을 걸어본다. 그리고 딸아이에게 나의 봄 이야기를 고백해본다.
“엄마는 4계절 중에 봄이 제일 좋아. 우리 봄이가 우리 가족에게 온 계절이고, 비로소 5명의 완전체가 된 거 같거든. 엄마 딸로 와준 봄이가 너무 고마워. 엄마는 오늘 저녁 밤샘 비행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다녀올거야. 두 밤 자고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