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미술 전공하셨어요?”
인천 출발 편 lay over (현지 체류) 국제선 비행에서 후배들이 나에게 묻는다.
현지에서 내가 미술관을 방문할 거라는 계획을 알리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질문이다.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저 ‘미알못’이에요!”
그렇다. 나는 미술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얕지만, 미술관을 좋아한다.
생각해 보니 미술관에 대한 나의 마음이 막연함에서 평안함으로 바뀌었던 시기가 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던 코로나 팬데믹 시기 엘에이에 살던 친구는 한국산 KF94 마스크를 공수해 날라주던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게티 센터를 안내했었다. 마스크를 쓰고 친구를 따라 우연히 방문했던 그 순간이 내게는 지루하다기보다 꽤 흥미롭게 다가왔고, 마음의 치유로 느껴졌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해외 체류 중에 미술관을 지속해서 찾게 된 것은.
이번 시드니 비행 역시 나는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미술관’을 방문하기로 마음을 정해두었다.
동료들과 아침 뷔페를 먹고 나만의 탐험을 위해 기분 좋게 호텔을 나섰다. 서울에서 봄비를 맞으면서 출근한 나는 이곳 시드니의 가을 하늘과 도심 속 푸르른 녹지들에 그저 감탄하며 핸드폰으로 풍경을 담고 또 담았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contact-less 신용카드 (와이파이 그림이 그려진) 한 장만으로 전 세계의 대중교통을 편하게 이용하는 이 시대에 감사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넷플릭스의 “중증외상센터”를 보고 있는 옆좌석의 호주인을 발견한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역시 세계 속의 K culture!!!! 로구나~^^’
세인트 제임스 역에 내려 하이드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크고 마른 금발 청년의 버스킹 모습을 보며 잠시 벤치에 앉았다. 한국의 월요일 공원 풍경도 이와 같았을까? 그들의 여유로운 모습에 취해 잠깐이나마 외지인임을 숨기고 함께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다시 걸음을 옮겨 숲길을 따라 5분 정도 후에 주립 미술관에 도착했다.
작년 가을 나는 이곳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이자 철학가인 이우환 작가와 처음 만났다. 그리고 “How we share cake” (원제: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방법)이라는 영어 제목으로 서가에 비치된 김효은 작가의 그림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으로 한국문학의 쾌거를 이루었던 시기였기에 그림책의 번역자는 누구일까 자연스레 궁금해졌고 한강의 문학들을 번역한 Deborah Smith의 이름이 표지에 적혀있음을 알게되었다. 세계 속에서 인정받고 있는 K culture를 직접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고 감동적인 순간들이었다.
이번 방문은 어떤 새로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나를 설레게 한다. 작년에 둘러보지 못한 지하층으로 향했다. 벽면 가득 무언가 그려져 있고 중앙에 테이블과 빈백에서는 사람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거나 쓰고 있었다. 강렬하게 눈에 띄는 빨간색 벽. 그 위에 하얀색 고딕체로 작가의 이름이 있었다.
Hikoko Ito
“히코코 이토는 일본 아키타현 출신의 건축가이자 아티스트로 현재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건축, 시각예술, 설치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특히 한자와 감성적 상호작용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에 지식 가이드가 된 chat GPT가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벽에 그려진 저 366개(윤년 포함)의 문양들은 한자를 모티브로 해서 그림으로 표현한 듯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또 다른 벽면에는 같은 문양이 새겨진 366개의 작은 우편함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하! 방문객들은 월별로 분류해 둔 문양들 속에서 자신의 생일 문양을 찾고 그 문양이 새겨진 우편함을 열어 이전 방문객이 남긴 생일 카드를 받게 되는 거구나! 그리고 다음 방문객을 위해 새로운 카드를 작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날짜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우체통이 무작위로 섞여 있는 게 아닌가. 366개의 우편함에서 나만의 생일 문양 우체통을 찾는 일은 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스마트폰 카메라로 내 생일 문양을 찍고 화면 속 이미지와 대조해 가며 우체통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았다. 비슷한 듯 다른 문양들 속에서 드디어 발견!!! 설레는 맘으로 우체통의 문을 조심히 열어보았다. 여러 장의 생일 카드로 가득 찬 우체통 안에서 순간의 느낌을 따라 내 생일 날짜인 일곱 번째 카드를 집어 들었다. 나의 생일을 축하하며 손 편지를 써 준 생일 쌍둥이는 누구일까? 국적도 나이도 알 수 없었지만, 사랑스러운 글씨체로 써 내려간 그의 다정한 손 편지를 읽으며 나의 온 마음이 햇살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아마 여기 있는 모두가 비슷한 마음이겠지?!
나는 긴 테이블 앞에 앉아 또 다른 나의 BIRTHDAY TWIN을 위해 카드를 써보기로 했다. 인사말을 영어로 쓰다가 문득 한국어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요즘 K CULTURE와 더불어 한국어 배우기가 열풍이니 조금의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나의 생일 쌍둥이는 한국어를 배운 사람이길 상상해 보며 알록달록 색깔 펜들을 집어 들었다. 만난 적 없는 그에게 생일 축하 카드로 나를 소개하며 혹시 지금 이 공간 어딘가에 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Dear my birthday twins
Nice to meet you and Happy birthday.
당신은 혹시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나요? 한국어를 배운 적은요?
저는 한국에서 항공사에 근무하고 있고, 여행 중 작은 도전과 발견을 통해 배우기를 좋아해요. 시드니 비행을 왔다가 우연히 찾아오게 된 이곳에서 당신을 축하해 줄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요. 앞으로의 생일 때마다 당신을 함께 떠올리고 축하해 주게 될 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건강하고, 어디에 있든지 행복하길 바랄게요.
Have a wonderful day with this card~
from your birthday twins SUNNY
자연스럽게 이끌린 참여를 통해 세대와 인종을 아우르는 따뜻한 연결과 소통을 경험하게 해 준 작가의 넉넉한 마음과 빛나는 기획력에 감탄한 나는 그녀의 기발한 제목을 음미하듯 혼잣말로 따라 해 보며 미술관을 나왔다.
“HAPPY BIRTHDAY 2U2(to you too)”
한국으로 돌아와 대청소를 핑계 삼아 온 집안을 뒤엎은 끝에 여기저기 보물 찾기처럼 흩어져 있던 나의 편지들에게 차곡히 서랍 한 칸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학창 시절 주고받았던 친구들과의 편지들, 남편이 매년 써주었던 기념일 편지들,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꾹꾹 눌러쓴 편지들, 회사 선후배들의 작은 쪽지와 카드들, 그 옛날 아날로그식 고객들의 감사 메시지들까지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 위에 birthday twin의 카드도 살포시 올려두었다. 그리고 향긋한 커피 한잔을 내려 식탁 앞에 앉아 나보다 30여 년을 먼저 치열하게 살아오신 4남매의 어머니인 그분을 떠올리며 펜을 들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 다둥이 맘이시자 올해로 팔순을 맞으시는 시어머니께 봄에 어울리는 예쁜 꽃 편지지를 골라 디지털 메시지로는 주고받지 못했던 나의 마음들을 꾹꾹 눌러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