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가까이 국제선 상위 클래스에서 붙박이로 일하는 나로서는 한 달 스케줄표에 국내선 비행이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이유는 3가지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인천 국제공항이 아닌 김포 국제공항을 이용하므로 출퇴근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둘째, 4세트를 평균으로 하는 (승무원들은 김포-제주-여수-제주-김포 구간을 4 LEG 비행이라고 표현한다.) 국내선의 가장 긴 비행시간은 김포-제주 구간(55분)으로 대략 1시간마다 도착지에서 핸드폰을 켜고 아이들을 챙길 수 있다. 셋째, 국제선 비즈니스 클래스의 코스 요리 서비스와 달리 음료 또는 사탕만 제공하는 간단한 서비스가 심리적, 체력적인 부담감을 줄여준다. 하지만, 이착륙 준비와 안전, 보안에 관해서는 국제선과 국내선 모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는 적당한 타협이 없다는 걸 정확히 짚고 넘어간다.
정리하자면, 나에게 국내선 비행이란 하루를 다 소진하지 않아도 되는 짧고 간단해서 아이들 챙기기에 최적화된 ‘워킹맘을 위한 비행’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누구보다 즐겁게 국내선 비행을 하는데, 작년부터 나만의 special 서비스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마음을 전하는 나만의 비밀 프로젝트>이다.
누구도 하지 않는 이 업무를 나는 왜 하게 된 걸까?
2023년부터 1년 넘게 지인들과 글쓰기 공부팀을 꾸려서 함께 글쓰기 관련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됐던 나는 더불어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작가들의 책들을 찾아 닥치는 대로 읽기도 하였다. 에세이와 자기 계발서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 한 책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저 맡은 일에만 충실하던 나와 다르게 그녀는 매 비행 손님들과의 교감을 느끼고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그저 불특정 다수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녀는 one of them을 찾아 퍼스널 터치를 하며 좀 더 특별하고 감동적인 그녀만의 시그니쳐 서비스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태도에 감동했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실천하기가 나의 취미이자 특기이기에...^^)
음료 서비스가 끝나는 시점과 착륙 준비를 시작하는 20,000ft 사이에는 보통 5~10분 정도의 시간이 남는다. 대부분의 비행에서는 함께 일한 동료들과 생수로 목을 축이며 서로의 수고를 격려한다. 여유로운 이때가 바로 행동 개시할 타임이다. 비행 중 눈여겨본 손님에게 살며시 다가간다. 40대에 본격적인 독서를 시작한 나는 특히 책을 들고 타시는 손님을 유심히 찾곤 한다. 200명 가까이 탑승한 비행기 안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스마트기기로 시선을 향해 있거나 피곤함에 눈을 붙인 승객들이 대부분인데, 내 눈에 정확히 들어오는 독서가의 모습은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아 보인다. 그분이 읽고 계신 책은 뭘까 상상해 보며 조심히 다가가 무릎을 꿇으며 눈을 맞춘다. “손님, 오늘 182명의 탑승객 중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고 계십니다. 상위 1%만이 가지고 있다는 독서라는 취미를 이렇게 멋지게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국내선 비행이라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없고, 약소하지만 이 메모지와 볼펜을 선물로 드려요.” 여수에서 제주로 향해 가시던 깔끔한 정장의 노신사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계셨다. 읽고 계신 페이지를 바닥으로 향하게 내려놓으며 껄껄 웃으시는 그분이 나에게 답한다. “그런가요? 나야말로 고마워요.”
착륙 준비를 위해 다시 가 보니 기분 좋게 미소 지으시며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고 계신다. 새하얀 천에 물감이 번지듯 그 미소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국내선의 음료 서비스는 간단해서 누군가에게는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 빈약해 3~4잔은 드셔야 만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중학생쯤 돼 보이는 한 여학생이 내 시야에 들어온다. 음료를 마다하고 무언가에 열중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책가방에서 꺼낸 수학 문제집을 열심히 풀고 있는 것이다. ‘뉘 집 딸내미인지 참 야무지고 기특하다.’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지며 한편으론 이 상황을 놓칠 수 없었다. “학생,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 이모가 멀리서 지켜봤어요. 너무 멋지고 훌륭해요. 이다음에 커서 꼭 우리나라를 빛낼 어른이 될 거예요. 국내선 비행이라 드릴 건 없지만 ear plug와 볼펜이에요. 공부할 때 필요한 것들이라 선물로 드려요.” 아이는 당황했지만 수줍게 웃으며 인사한다. 도착지에서 하기할 때 그 여학생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두 손을 모아 다시 한번 공손하게 인사를 전한다. 나는 응원의 마음을 가득 담아 환한 미소로 답한다.
국내선 비행기에서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건 가족 단위 손님일 것이다. 특히 나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 다둥이 부모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동질감을 느끼며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아줌마의 오지랖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하면 한마디라도 던져 볼까 애를 쓴다. 아이들의 엄마는 이미 지친 모습으로 좌석에서 세 명의 아이들을 챙기고 있다. 나는 그분께 다가가 지퍼백에 담긴 1회 용 물티슈 팩을 조심스레 건넨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나를 향해 올려보는 그분께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저도 아이 셋 키우는 다둥이 엄마예요. 아이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지켜만 볼 수가 없었어요. 저희 아이들의 이맘때도 생각나고요. 국내선 비행이라 드릴 건 없고, 기저귀 가방 속 필수품인 물티슈 좀 챙겨드려요. 다둥이 부모님 응원합니다.”
때로는 실망스럽고 불쾌한 상황이 오기도 한다. 그날은 김포-제주 구간 만석의 손님이 탑승하셨고, 나의 점프싯 (이착륙 시 승무원이 착석하는 좌석)은 손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나와 마주 앉은 손님은 젊은 여자분이었는데 비행기 창밖의 풍경을 연신 촬영하고 계셨다. 안전하게 착륙을 하고 하기를 위해 일어서는 그분의 핸드폰 속에는 점프싯에 좌석벨트를 매고 앉아 있는 나의 몸 사진이 담겨있었고 카톡으로 친구에게 전송까지 한 상태였다. 순간 나는 단호하고 엄한 표정으로 손님께 말했다.
“손님, 타인의 신체 사진을 동의 없이 이렇게 함부로 찍으시는 것은 법의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당장 지워주세요. 경솔하셨습니다!!!”
여자 손님은 사과의 인사 없이 핸드폰 속 사진을 지우며 그저 불편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조용히 비행기 밖으로 나갔다. 나만의 비밀 프로젝트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음 비행을 기다린다.
사람들은 항공사 승무원을 ‘감정노동자’로 분류하곤 한다. 마음에 없는 감정을 참고해 내는 노동이라면 하루하루가 힘들고 괴로운 날들의 연속이겠지만, 나의 진심을 표현하는 진정성으로 채워가는 날들이라면......
아마도 시간이 한참 흐른 어느 노년의 일상에서도 나만의 충만했던 비행 인생들을 추억하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분은 비행기에 타실 때 어떤 걸 준비하시나요?
노트북? 아이스 아메리카노?
여러분만의 반짝반짝한 특별함을 보여주세요. 제가 발견하고 조용히 다가가 인사드릴게요. 놀라지 마세요. 저의 마음을 듬뿍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