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힘든 호찌민 비행이었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일요일 아침 집에 돌아왔는데 거실 한구석에 택배 상자들이 쌓여있었다. 아이 셋을 돌보며 세끼를 챙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주말 동안 남편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던 나는 비행 출발 전 곤드레나물, 3분 카레 등을 온라인으로 급하게 주문했었다. 하지만, 부연 설명 없이 바쁘게 떠났던 주인을 원망하는 듯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한 물건들은 말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책으로 보이는 주황색 작은 봉투가 눈에 띈다. 이건 내가 주문한 게 아닌데 뭐지? 어머나! 아로마의 글쓰기 선생님이 보내오신 책이었다. 우와! 이분은 내가 좋아하는 선물이 책과 편지라는 걸 아셨던 걸까?! 비행 생활에 관한 릴레이 글쓰기를 시작하며 아로마에게 전달한 나의 두 번째 글을 읽어보신 후라 아마도 응원의 마음으로 선물을 보내신 듯했다. 어떤 책일까 기대를 한껏 품으며 유니폼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서서 포장을 뜯었다. 아마추어인 우리들의 글쓰기와는 다르게 전문가의 향기가 솔솔 풍겨 나온 작가님의 에세이는 자기소개를 하는 것 마냥 그간의 삶을 매일매일 글로 써내려 가셨다.
세 아이를 키우시는 아빠구나. 나처럼 애국자시네. 직업이 몇 개야? 요즘 시대에 딱 맞는 인재시구나. 천국에 계신 어머님의 빈자리를 슬픔과 상실 속에서 글로 채우셨구나. 야구를 엄청 좋아하시나 보다. 운동선수들의 자서전도 많이 쓰셨구나. 김연아의 자서전을 소재웅 작가님의 글로 읽게 되는 날이 오겠네. 작가님, <우영우> 드라마는 저도 봤어요. 저희 집은 tv가 없어서 드라마는 관심도 없지만요.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으시다고요? 그렇다면 어린 세 공주님들과 온 가족이 함께 영어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어보세요. 샌프란시스코에 이렇게 멋진 서점이 있다고요? 제가 꼭 한번 가서 인증숏을 남길게요. 그분의 생각이나 취향, 일상들을 읽어 내려가며 떠오른 영감들을 따라 나만의 대화를 이어갔다.
<러브레터> 영화에 관한 선생님의 글을 읽던 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 극장들을 검색해 보았다. 30년 전 그 영화는 작가님의 글 속에서 7번째 재개봉을 했었고, 그 에세이를 읽고 있는 나의 지금도 다시 개봉 중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극적인데? 그런데 9번째 재개봉하는 <러브레터> 영화의 상영일이 딱 오늘까지였다. 상영 중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놓칠 수는 없었다. 나는 갑자기 두 아이들의 학원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시간을 조정하고 막둥이의 유치원 하원과 동시에 급하게 버스에 올랐다. 가방을 집에 두고 오면 영화 시간이 맞지 않아 유치원 가방도 우리와 함께했다. 중학생과 초등고학년인 두 아들들은 사춘기 초입이라 부모와의 일상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여주고 싶은 엄마는 딜을 한다.
"자전거를 타고 너희끼리 와서 좌석 배정도 너희끼리 따로 해. 그럼 어떨까"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영화길래 엄마가 이리 야단법석인지 궁금해하면서 그런 식이면 좋다고 승낙한다. 봄이 와 나는 마을버스로, 큰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극장에서 만났다. 좌석 배정을 각각하고 팝콘을 챙겨주며 착석했다. 사실 큰아이들은 잘 볼 테지만, 미취학 우리 집 막둥이에게 오른쪽 세로 자막을 읽어 내려가야 하는 일본 영화는 난이도 최상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티켓을 구입한 엄마는 이 영화의 느낌만이라도 생생히 전해지길 바라보았다. (첨언을 하자면 이 영화의 상영등급은 전체관람가였다.)
넷플릭스가 우리의 삶으로 들어온 이후 난 집에서 보는 영화와 극장용 영화를 구분 짓기 시작했는데, 월구독료로 언제든지 쉽게 집에서 보는 영화와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꼭 봐야 하는 영화를 나만의 기준으로 정해둔 거였다. <러브레터>는 후자에 속하는 영화였다.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
명대사와 어렴풋한 줄거리들만 기억하던 나는 아이들은 안중에도 없이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영화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울고 있는 엄마 옆에서 우려와 다르게 끝까지 잘 본 셋째 봄이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이렇게 묻는다. “주인공 이름이 이츠 키지?” 이 녀석 화면만 본 건 아니었구나~
중학생 가을이는 나의 예상대로 홈런을 쳤다.
“와~~ 이 영화 진짜 재밌었어~ 와~ 엄마가 극장으로 달려간 이유를 알 거 같아~ 와~와~ 와~"
이 녀석 입에서 와~가 몇 번 나온 건지^^
둘째 여름이의 감상평은 이랬다.
"한 배우가 두 명을 연기해서 헷갈렸어~ 한 번 더 보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소 작가님의 에세이 속 에피소드 덕분에 나는 먼 훗날 아이들과 추억할 소중한 우리만의 <러브레터> 감상문을 얻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른이 된 아이들에게 <러브레터>라는 영화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영화 속 이츠키가 학교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서 카드에 그의 첫사랑이자 또 다른 이츠키의 초상화를 그려 넣은 것처럼 나는 우리만의 보물 찾기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소작가님의 책 <쑥스러운 게 아니라 어색한 거야>의 57페이지에 우리가 함께 본 영화 티켓을 살며시 꽂아둔다. 거실 책장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할 아이는 셋 중 누가 될지 기대하며 2025년 2월의 어느 늦겨울날을 기억해 주길 바라는 엄마의 욕심 한 스푼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