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없는 무대, 나만의 고도를 높이는 법

by 사계

장거리 비행 업무를 안전하게 끝내고 이국의 어느 호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는 복도 끝에서 나의 진짜 하루가 시작된다. 닫힌 방문 뒤로 혼자가 되는 순간,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이 사각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나에게 가장 고요하고도 엄격한 시험대가 된다.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옷장을 여는 것이다. 피로가 어깨를 짓누르지만, 제복을 아무렇게나 던져두는 일은 없다. 키 큰 옷장 속에 유니폼을 차례로 걸어둔다. 접혀있던 앞치마와 카디건도 하나씩 옷걸이에 자리를 만들어주고 신고 있던 구두까지 옷장 바닥에 가지런히 넣어둔다. 이어 캐리어를 열면 그 안에도 나만의 질서가 펼쳐져 있다. 피곤함에 절어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고 물건들의 자리를 찾아주면 비로소 한숨이 돌려진다. 낯선 호텔 방에 나의 일상을 이식하는 이 사소한 의식은 나라는 유일한 관객 앞에서 스스로 품위를 지키려는 자기 존중의 몸짓이다.

누군가는 며칠 묵고 떠날 공간이니 대충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침대는 흐트러진 채로 두어도 되고, 캐리어는 활짝 벌려둔 채로 나가는 것이 편할 테니까. 넷플릭스를 보며 침대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아무도 나를 보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나를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방을 정갈하게 사용하려고 애쓴다. 신발은 가지런히 두고, 입은 옷은 바로 정리하고, 냄새나는 음식을 방에서 먹지 않고, 쓰레기 하나도 그대로 두지 않으려는 것이다. 누가 검사하러 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작지만 까다로운 기준을 세운다.

예전에는 그것이 단정한 습관을 만드는 예절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읽고 쓰는 삶’이 선택이 아닌 일상이 되도록 환경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침대 옆 콘센트는 비워두고 대신 가져온 책들을 협탁에 올려둔다. 벽을 마주한 책상 위에는 다이어리와 필통을 놓아둔다. 난기류 같은 무질서 속에서는 사유가 안정적으로 고도를 유지할 수 없다. 책을 펴기 전 주변을 정돈하는 이 행위는, 책 속으로 이륙하기 위한 나만의 활주로를 닦는 일이다. 지상의 소란함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나만의 문장으로 내 안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고요한 선언인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내가 모든 날이 승리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비행의 피로가 뼈마디에 스며든 날, 나의 다짐은 무너지고 무력하게 핸드폰의 끝없는 스크롤 속에 나를 방치하곤 한다. 그럴 때 나는 최후의 보루로 조식 뷔페를 택한다. 아침 6시, 호텔의 아침 식사가 시작되는 가장 정적인 시간에 책 한 권을 들고 내려간다. 관객 없는 무대에서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면, 역설적으로 타인의 눈이 존재하는 광장으로 나를 던지는 것이다. 하얀 리넨 앞치마를 두른 직원들과 부지런히 아침을 여는 투숙객들 사이에서, 나는 비로소 다시 정중해진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적당한 긴장감을 빌려 무너졌던 나의 삶을 다시 수선해 나간다.

이 혼자만의 고군분투는 올해 시작한 북클럽 <문장의 고도>를 통해 조금 더 단단해졌다. 비행 중에는 같은 고도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동료들이 이제는 각자의 방에서 길어 올린 문장들로 서로의 삶을 지탱해 준다. 우리는 각자의 책을 읽다가 때론 같은 책을 읽고 본인만의 삶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을 나누며, 서로의 생각이 머무는 높이를 조금씩 끌어올린다.

나를 움직이는 힘은 거창한 목표나 성공 신화에 있지 않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서 정돈된 환경을 꾸미는 내면의 질서, 그리고 그 질서가 흔들릴 때 기꺼이 타인의 시선과 동료의 곁으로 걸어 들어가 나를 다시 세우는 정직한 용기이다.

귀국 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이번 주도 열심히 읽어준 여러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문장의 고도> 카톡방에서 방장님의 기분 좋은 메시지가 울린다. 소음으로 가득한 공항 철도 안에서 나는 다시 가방 속의 책을 펼친다. 호텔 방에서 지켜냈던 그 정갈한 마음이 지상에서도 이어지는 순간, 나는 여전히 나만의 고도로 순항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단단한 연결고리가 있다면, 나는 어떤 낯선 도시에서도 그리고 어떤 소란한 일상에서도 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비교의 선 바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