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의 선 바깥에서

by 사계

자존감의 바닥은 반드시 불행에서 시작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의 이면에서 서서히 무너진다. 나는 꿈에 기다렸던 출산을 했고, 그토록 고대하던 육아를 했다. 아들 둘과 함께한 시간은 분명 행복했다. 4년 가까이 쉬면서 하루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었고, 아들들의 웃음과 성장으로 하루가 채워졌다. 누구보다 필요로 되는 존재라는 감각 속에서 나는 충분히 따뜻했고,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그런데 복직을 생각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승무원 사회는 늘 단정하고, 빠르고, 비교가 분명한 세계인데, 그 치열한 곳을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공백은 설명이 필요하고, 느려진 손과 머리는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3년 10개월이라는 시간은 아이들에겐 성장의 시간이었지만, 나에겐 뒤 쳐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근거가 되었다. 이 평온한 세계를 벗어나 다시 평가받는 자리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자존감은 그 지점에서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나와 항공사 승무원으로서의 나. 둘 다 나였지만,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지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색동 무늬의 꼬리 날개를 발견할 때면 마음 한편이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두려움을 안은 채 다시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는 여전히 경쟁을 동력 삼아 사람을 움직이고 있었다. 기내 평가와 방송, 외국어 능력으로 등급으로 매기고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웠다. 무능한 회장이 자신의 주머니만 채우며 회사를 서서히 말아먹는 동안, 직원들의 월급은 동결되었고, 교육은 중단/축소되었으며, 진급은 더 치열해졌다. 여 초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출산과 육아로 인한 복지와 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복직한 승무원과 생리 휴가 쓰는 승무원은 절대 진급 안 시킬 거다.” 아이를 낳고 키워본 경험이 없는 한 여자 파트장의 말은 지금까지 회자되기도 한다.

욕심과 능력이 많은 선, 후배들은 사생활을 포기하고 회사를 위해 그들의 삶을 모두 바쳐 달리곤 했다. 대리라는 직급을 위해 임신을 미루어야 했고, 과장이라는 직급을 얻기 위해 가정과 육아를 내려놓아야만 가능했던 시기였고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욕심과 능력은 정 비례인 걸까? 나는 욕심도 없을뿐더러 능력도 탁월하지 않아 복직 후 영입된 ☆☆ 팀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조용히 맞은 일에만 충실했다. 어린 아들들을 챙기며 일하기에도 삶은 더없이 빼곡했다. 임신 휴직 전, 회사 일에 열정적이던 내 모습을 보고 ☆☆팀의 합류를 권하셨던 A 과장의 눈에는 승진과 점점 멀어지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안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0년 뒤 그녀는 회사를 위해 자신의 건강을 바쳤다는 것을 깨달았고, 스스로의 삶에 좀 더 비중을 두지 않았음을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복직 후 4년쯤 지나고 ☆☆팀에는 B팀장과 그녀의 인맥으로 구성된 새로운 팀원들이 들어왔다. 외모, 능력, 스펙, 태도 때로는 집안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그녀들의 등장은 나의 자존감을 더 빠르게 추락시켰다. 그중에 아이를 낳고 키운 복직 승무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자신의 커리어 성장을 위해 달릴 준비된 그녀들이었다. 그들과 친밀함을 쌓기 위해 노력했지만, 왠지 모를 유리 장벽이 쌓이는 듯 느껴졌다. 노골적인 차별은 아니었지만, 출산과 가족 돌봄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중심에 서는 구조였다. 그 장벽은 누가 세운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있었다. 더 이상 버텨낼 자신이 없는 나는 또 다른 선택으로 그 상황을 피해 버렸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그들보다 작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작았던 것이 아니라 다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삶의 방향이 달랐음을 인정하고 자존감을 채우며 그 시기를 묵묵히 버텨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다행인 건 그 이후에 나는 자존감을 키우는 방법을 배우고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나만의 기준으로 내 삶을 단단히 쌓아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 운동을 하며 몸과 마음의 균형을 되찾는 시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회복하고 있다.

이제 나는 또 한 번의 거대한 변화를 앞두고 있다. 국내 업계 1위 항공사에 흡수합병되면서, 다시 한번 낯선 질서와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조직의 이름이 바뀌고, 기준이 달라지고, 비교의 선이 다시 그어질 것이다. 예전의 나라면 이 변화 앞에서 먼저 작아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질서 안에서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으려 한다. 나는 더 이상 줄 세워진 기준의 맨 앞이나 맨 뒤에 서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자존감은 결국 잘 해냈다는 결과의 확신이 아니라 나의 선택을 함부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에서 자란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비교의 선이 다시 그어져도 나는 그 선 바깥에서 나만의 속도로 당당히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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