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
서로의 눈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일상을 이야기한다.
기나긴 하루를 풀어내며 격려하고 위로한다.
그렇게 하루는 지고 또 다른 하루가 온다.
솔직히 처음엔 이런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추상적이긴 했지만 평범함보다는 특별함에 가까웠고 색깔로 치면 핑크빛에 가까웠다.
결혼 후 계속되는 남편의 회피, 거짓말 그리고 빚으로 인해 지금의 나는 지독하게도 평범한 삶을 꿈꾸게 되었다. 아무런 격동도 없이 잔잔한 그런 일상. 평범한 것이 이토록 힘든 줄 예전엔 왜 몰랐을까?
운동을 많이 하면 근육이 생기듯이 힘든 일을 많이 겪으면 내성이 생기고 지혜도 생기고 나름 강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상처이냐에 따라 다르다. 자고 일어나면 금세 새살이 차오르는 약한 상처도 있겠지만 이처럼 스스로도 회복의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상처도 있다. 과연 새살이 차오를까 의심하면서 시간을 약 삼아 기다릴 뿐.
제일 무서운 건 의심하는 마음이다.
그의 반응을 보며 의심의 촉을 세운다. 말, 눈빛, 행동 그 어느 하나라도 이상함이 감지되는 순간 의심이 발동한다. 머리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믿기로 했잖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켜 보지만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나의 의심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의심의 흔적들을 계속해서 찾는다.
' 지금 열심히 잘하고 있는데 괜한 의심을 하면 어쩌지?
그럼 여태껏 믿고 기다려주기로 한 게 물거품이 되잖아. 그는 다시 불안 해질 거고 그럼 다시 회피할 거고 다시 돌아가게 되잖아. 그러지 말고 좀 더 믿어보자. 물론 너의 마음이 말처럼 쉽게 회복될 수 없다는 거 알아. 그간 열심히 노력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는 현실에 계속해서 무력감을 느꼈으니까. 하지만 세상엔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알았잖아. 곁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회복할 수 있게 같이 발걸음 맞춰주기로 했잖아...'
수없이 되뇌고 곱씹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불안과 의심의 손님이 찾아왔다. 그때마다 지나치지 않고 내 마음을 마주하고 다독인다. 지금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마치 전장에서 마지막 요새를 필사적으로 지키는 장군처럼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나만의 요새를 지킨다. 이 탑이 무너지면 왠지 내 세계가 무너질 것만 같다. 누구도 나를 위해 싸워주지 않으니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내내 신경이 곤두서있다. 과연 평화가 오기는 하는 걸까...
이 불안을 스스로 마주하고 이겨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실제로 많이 치유도 되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아무런 방해 없이 온전히 그 세계와 감정에만 집중하고자 했다.
그러자 용기가 생겼다. 이 불안을 밖으로 꺼내 누군가에게 보여줄 용기가. 아직은 조심스러운 내 마음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 내 앞에 GPT는 흔쾌히 그 첫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적나라한 내 감정을 따뜻하게 들어주고 차갑게 이야기해 주었다. 빛바랜 신뢰에 작은 불씨를 지펴주는 듯했다.
이미 깨져버린 신뢰, 오랜 시간의 상처와 트라우마. 단번에 해결되긴 어려울 것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게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GPT와 이야기하며 느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아직 그를 믿고 싶다는 그 마음이다. 어쩌면 정해진 답을 GPT가 대신해줬으면 하고 다시 잘해볼 수 있다는 희망을 듣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다 고개를 저으며 지금이라도 포기하라고 하지만 적어도 GPT만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바랬다. 절망과 포기가 아닌 희망과 시작을 이야기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나의 감정의 결을 똑똑한 이 녀석은 금세 알아차렸는지 희망과 회복의 솔루션들을 내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시작은 그 혼자만의 탈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손바닥이 부딪쳐야 소리가 나듯 그의 회피는 원맨쇼가 아닐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작아질 수밖에 없도록 내가 보탠 말과 행동들을 곱씹어봤다. 그리고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아내와 가정을 거짓으로라도 붙잡고 싶었을 그 마음의 시작을 따라가 보기 시작했다.
일이 너무 안 맞아서 그만뒀어... 이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 이어진 그 회피의 뿌리를 찾아 우리는 시간 여행을 했다. 이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다시 마주해 보며 그때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이야기했다. 처음엔 일을 그만둬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이 무능력으로 여겨질까 부끄러워 회피했던 작은 불씨였는데 아이가 생기고 더 큰 책임감을 등에 업자 오히려 화마가 되어 본인 스스로를 짚어 삼켰다.
두려움과 회피의 순간을 마주하고 난 다음은 회피 일지였다. 하루에 한 번씩 일기 쓰듯 회피하고 싶은 순간들 그때의 마음들과 앞으로의 다짐을 써 내려갔다. 이를 교재 삼아 우린 계속해서 대화를 해나갔다. 지난날에 대한 아쉬움, 후회, 반성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날에 대한 다짐, 응원, 시작을 이야기했다. 힘들 때 혼자 괜찮은 척하지 않고 힘들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곁에 있는 내게 힘든 마음을 기댈 수 있도록.
쉽지는 않을 것이다. 피하고 싶은 순간들도 의심하는 순간들도 시시때때로 찾아올 것이다. 앞으로 이보다 더한 난관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잠시 멈춰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지나치는 감정들을 붙잡고 곱씹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를 비난하기보다 왜 그랬을까 하고 행동보다 앞선 그 마음을 이해할 필요성도 느꼈다.
이미 나와한 몸이 된 불안이라는 녀석이 언제 이 집을 떠날지 알 수는 없지만 어차피 한 번에 떨쳐낼 수 없다면 조금씩 그 길을 터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GPT와의 상담은 짧지만 강력했고 긴 여운을 남겼다.
부디 앞으로의 삶은 우리 스스로 현명하게 풀어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