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던 밥솥이 들려준 건 회복의 신호일까
언제부턴가 밥솥이 울리지 않았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약 30분이 지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니 늘 30분이 다 되어야 밥솥 앞에 다가갔다. 밥솥을 열면 늘 그랬듯이 뽀얗고 하얀 밥이 완성되어 있었다. 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으레 짐작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놓았기에 전혀 몰랐다. 이미 밥솥이 고장 나 있다는 것을..
문득 어느 날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30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나는 좀처럼 기다리지 못하고 밥솥만 계속 응시했다.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도 밥솥은 아무 소리 없이 고요했다. 가끔 깜빡거리는 빨간 표시등과 한숨 쉬듯 작게 뿜어져 나오는 아니 새어 나온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하얀 연기만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안에서 뭐가 되고는 있는 것 같은데 이게 맞나...???'
그제야 그간 이상하게 조용했던 밥솥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아무 의심 없이 먹었지만 밥맛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할 만큼 예민하지도 않았기에 뭔가에 홀린 듯 가만히 밥솥을 응시했다. 그렇게 밥솥을 잠시 응시하고 있는 사이 밥솥은 제 할 일을 끝냈다며 밥을 맛있게 먹으라는 최후의 멘트를 건넨다.
밥솥을 사야겠구나... 요즘 밥솥 비싸던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되긴 하니까 뭐 밥맛에 큰 차이 있겠어? 하는 귀차니즘이 함께 발동해 한동안 또 잊고 살았다. 밥솥의 그 고요함을...
마흔 중반의 그는 여전히 구직 중이었다. 꽁꽁 얼어붙은 취업 시장에서 오히려 신입보다는 경력직 신입이 인기가 더 많다는 기사에 억지로 의미 부여해 가며 계속해서 도전했다. 그의 남다른 무기인 성실함으로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지금쯤 중책을 맡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마치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처럼 그 누구보다 구직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누구보다 새로 일어설 기회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 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그간 재정비하면서 정리하고 내려놓은 마음들을 다시금 현실에 부딪쳐 보며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간절한 마음에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 좀처럼 면접 기회는 잘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에 단단히 먹었던 마음도 시간이 점차 지나자 조금씩 바래졌다.
'이러다 취업이 안되면 어쩌지?'
'시간이 더 길어지면 어쩌지?'
말로는 괜찮다 괜찮다 했지만 우린 속으로 그 누구보다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길어지는 시간만큼 짙어진 걱정과 불안은 흐릿하게나마 남아있는 자신감의 흔적도 조금씩 지우고 있었다.
아빠에게 일은 단지 물질적 기능만 하지 않는다. 아이에게는 타인에게 내 부모를 설명할 명함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가 동경하는 세계가 되기도 한다. 또 돌봄이 필요한 아이에게 돌봄 교실을 이용할 수 있는 1순위 조건인 맞벌이를 충족시켜 줄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당장의 생활비보다 적어도 나에겐 이러한 의미가 더 중요했다.
그렇게 불안한 마음과 더디게 가는 시간 속 가끔은 면접 기회도 찾아왔다. 면접관들은 당연스레 긴 공백기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물어왔고 그는 전과 다르게 그 순간만큼은 괴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매일 하루에 한 번 진실의 순간을 마주하기로 마음먹고 반복해서 훈련 중인 그에게 과거의 행방을 쫓는 낯선 이들의 시선은 당연하면서도 불편했으리라. 예전이라면 술술 나왔던 거짓말도 이젠 좀처럼 쉬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면접만 보면 합격률이 꽤 높았던 그였지만 계속해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기회가 계속 오니까 좋은 신호로 받아들여야지 하며 애써 담담해했다. 걱정되고 불안해하는 만큼 더 웃기로 했다. 이 모든 상황이 그래도 거짓의 불편함보다는 더 낫다라며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가 그 면접관이었어도 그랬을 거라며 애써 그 면접관의 심정을 헤아리려 했다. 더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일어설 힘을 남겨두려는 듯 그렇게 남은 힘을 쥐어짜며 미소 지었다.
전에는 외식도 자주 했지만 지금 형편에 외식은 사치라는 것을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주방에서의 역할이 정해졌다. 그는 쌀을 안쳐 밥을 하고 나는 반찬을 만들었다. 그날도 자연스럽게 밥시간이 돼서 그가 밥을 하는데 그날따라 조용한 집 안에 갑자기 밥솥이 요란하게 울렸다. 밥이 되고 있는 건지 내내 고요했던 밥솥에 큰 구멍이라도 난 듯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뚜껑 틈으로 희미하게 연기가 새어 나왔던 그 고장 났던 밥솥이 아니라 당연히 연기가 나야 할 곳에서 시원하게 증기를 내뿜어내는 본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어? 이거 고장 났었는데 왜 갑자기 잘 되지?'
'이전에 뭔가 잘못됐던 건가? 이상하네...'
요리조리 밥솥을 뜯어봐도 갑자기 정상 작동하는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고쳐졌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혹시 일이 잘 풀리려고 그러는 것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들었다. 이런 게 삶이겠거니 세상엔 욕심낼수록 안 되는 일도 있고, 내려놓을수록 더 잘되는 일도 있겠거니 하면서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내 마주 보며 밥을 먹고 있는데 그의 핸드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바로 면접 합격 문자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트레이닝을 받을 예정이며 자세한 안내는 추후에 다시 주겠다는 문자였다. 처음에는 혹시 스팸인가 의심도 했지만 이내 현실을 자각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직은 너무 좋아하지 말자며 침착하기로 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합격하다 취소가 되기도 했고 출근을 했지만 조건이 맞지 않아 다시 돌아오기도 했기에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소식도 자나 깨나 불조심하는 심정으로 보기로 한 것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안도감 또 한편으로는 비장함으로 일단 부딪혀 보고 이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 줄 아니까 최선을 다해 보자, 진실된 마음으로 임해보자!하고 마음먹기로 했다.
"밥솥이 갑자기 소리가 나더니 고쳐진 게 신기했는데, 진짜 잘 되려고 그랬나 봐!"
평소 미신을 잘 믿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벌어진 상황이 너무 신기했다. 장난스럽게 오늘 좋은 소식 있는 것 아닐까? 했던 말이 정말로 현실로 이어지다니. 그간 힘든 마음을 부여잡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한 우리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정녕 하늘에서 기회를 주셨나?
좋으면서도 이것이 기회라면 그가 이를 잃지 않도록 꼭 붙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 줬으면 했다. 이는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한들 본인 스스로가 마음먹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내가 온 마음을 들여 걱정한들 가장 중요한 건 본인 스스로의 의지라는 것을 이제는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그도 같은 마음이기를. 이 기회를 소중하게 여기기를. 우리가 다시 온전한 평범한 가정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온 마음을 다해 빌었다. 부디 나의 이 마음이 그에게 부담의 언어가 아닌 믿음과 희망의 언어가 되어 닿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