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시집 / 허경진 옮김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 대학자 허엽의 딸로, 난설헌은 그녀의 당호이고, 본명은 허초희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인 그녀는 난초같이 고귀히 살다 간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我有一端綺 내게 아름다운 비단 한 필이 있어
拂拭光凌亂 먼지를 털어내면 맑은 윤이 났었죠.
對織雙鳳凰 봉황새 한 쌍이 마주 보며 수 놓여 있어
文章何燦爛 반짝이는 그 무늬가 정말 눈부셨지요.
幾年篋中藏 여러 해 장롱 속에 간직하다가
今朝持贈郞 오늘 아침 님에게 정표로 드립니다.
不惜作君袴 님의 바지 짓는 거야 아깝지 않지만
莫作他人裳 다른 여인 치맛감으론 주지 마세요.
- 견흥(遣興) 제3수
남편 김성립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시를 썼지만, 이 시는 대놓고 바람피우지 말라고 경고하는 재미있는 시다. 부부의 일은 부부만 아는 거라 우리가 왈가왈부하기는 그렇지만, 허난설헌의 시나 가사에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원망하는 내용도 많이 등장한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을 찍으니 남이 된다는 뭐 그런 내용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기록으로 보면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해서 홍문관까지 지낸 문장가이고, 또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나가서 전사하는 등 그리 무능하고 놀기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아마도 허난설헌을 돋보이게 하려는 동생 허균이나 후대인에 의해서 조금 왜곡된 면도 있는 것 같다. 허난설헌이 두 명의 자식을 연이어 잃고 나서는 아예 집을 따로 쓰는 별거 상태였지만 그녀는 남편을 많이 그리워한다.
去年喪愛女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今年喪愛子 올해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 슬프디 슬픈 광릉 땅에
雙墳相對起 두 무덤이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蕭蕭白楊風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紙錢招汝魄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玄酒尊汝丘 네 무덤 앞에다 술잔을 붓는다.
應知弟兄魂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夜夜相追遊 밤마다 서로 따르며 놀고 있을 테지.
縱有腹中孩 비록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 어찌 제대로 자라나기를 바라랴.
浪吟黃臺詞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血泣悲呑聲 피눈물 슬픈 울음을 속으로 삼킨다.
- 哭子(곡자)
이 여인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고, 조금만 후대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시를 읽으면 읽을수록 커진다. 난설헌은 8세 때 "보배로운 일산(日傘)이 하늘에 드리워지니 구름수레가 색상의 경계를 넘었고 은빛누각이 해에 비치니 노을난간이 미혹된 티끌세상을 벗어났다"라고 시작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주변의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딸의 천재성을 알아본 아버지 허엽은 당대 최고의 시인 '이달'에게 보내 시를 배우게 한다.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고, 재능을 기꺼이 펼치게 해 주던 그녀의 친정과 달리 시댁은 고루하기 짝이 없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정이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견뎌내기 어려웠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며느리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뚝뚝한 남편 사이에서 외로웠을 것이나, 그 외로움은 고스란히 시가 되었다.
그녀의 친정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그즈음 돌림병으로 두 아이까지 잃었고, 남편이란 작자는 바깥으로 돌았으니 그녀는 삶을 이어갈 이유를 상실했을 테다. 그래서 그랬는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썼고, 자신이 쓴 시를 모두 불태워 달라는 편지를 동생 허균에게 남기고 27세 아깝고 아름다운 나이에 숨을 거둔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中
허균은 누이의 시를 매우 아꼈기에, 편지로 보낸 시들과 자신이 기억하는 시들을 엮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인의 시집인 <난설헌집>을 펴냈고, 중국과 일본에서 먼저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양반 사대부 여성에게는 참으로 가혹했던 시기에 이렇듯 아름다운 시를 남긴 천재시인은, 후대에 자신의 시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울리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그녀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비극은 어느 정도 있어야 그 사람을 정말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