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603200012

by ODD

마지막 해외 여행은 4년 전이다. 첫 해외 여행은 캐나다, 초등학생 4학년 때였다. 이어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 체코, 러시아, 일본, 대만. 그 사이에 11개 나라를 가봤고, 일본은 5번을 갔기 때문에 15번의 해외 여행을 가봤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경험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여행에 무감해졌다. 워낙에 내게 여행이란 일반적인 사람의 여행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내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사람의 여행이란 말 그대로 여행이지만, 내게 여행이란 회피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 느꼈던 햇빛, 숨 냄새, 인간의 형태, 사회적 문화, 음식의 맛, 내가 눕는 곳과 횡단보도를 건널 때 마주치는 사람들이 달랐으면 하는 마음에 여행을 해왔다. 그러므로 내 여행의 목적이란 어디에 ‘도착했는가’가 아니라 어디로부터 ‘떠났는가’다.

그럴 때가 있다. ‘떠나고 싶다.’를 넘어서 벗어나고 탈출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단순히 어떤 상황이나 특정 환경, 장소라면 여행으로 해결될 때가 많지만,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는 어찌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다. 밀도 높게 응축된 순수한 지루함이 시간을 점점 더 느리고, 또 두껍게 만든다. 시간에서 못 벗어나니,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루함의 밀도를 낮추는 일뿐이다. 빨리 결과를 보고 싶다. 결코 결과가 기대돼서가 아니다. 결과가 어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저 이 지루한 과정에 너무나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지루함이 극에 달할 때면 피를 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자극을 위해서 내 몸에 뭔가를 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다행히도 바보 같은 행동이 될 거라는 걸 알기에 금방 생각을 바로잡는다. 손톱을 너무 짧게 깎아서 벌어진 손톱 아래의 통증이 재미있게 느껴질 정도로 지루하다.

그러니 즐겨야 한다. 즐기지 않으면 모든 감각이 지루함에 삼켜진다. 내가 뭘 즐기지? 좋은 주제를 찾아서 AI와 주고받는 훌륭한 대화는 날 하루 종일 즐겁게 해준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같이 노는 것은 날 몇 시간 정도 즐겁게 해준다. 내 스타일의 음악을 찾아 심취해서 듣는 것은 날 한 시간 정도 즐겁게 해준다. 이렇게 기록하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며, 글로 어떻게 남길까 고민하는 것도 날 한 시간 정도 즐겁게 해준다. 갖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들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날 반 시간 정도 즐겁게 해준다. 또, 혼자서 상상하다가 재미있거나 엉뚱한 생각에 폭소를 터뜨리곤 한다.

꽤 잘 즐기네 싶겠지만, 이 즐거움들이 늘 같은 힘을 내는 건 아니다. AI와의 대화가 매번 성공적인 것도 아니고, 마음 맞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음악은 한 번 깊게 빠지면 며칠은 무감해지기도 한다. 소비는 쌓이면 비합리로 이어지고, 손해를 인지하는 순간 즐거움이 쉽게 깎인다. 결국 즐거움이라는 득보다 지루함이라는 실이 더 많을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드는 생각이 있다. 주체가 누구지? 뭘 위해서 뭘 하는 거지? 늙은 날 위해서 젊은 날 투자해야 한다는 정론뿐인가? 내가 매 순간 이렇게 부정적인 건 아니다. 긍정적일 때는 날아가는 새에게 속으로 인사를 건넬 정도다. 희망이 느껴지고 과정이 즐거워진다. 실패에서 여유를 찾고, 스트레스조차 일종의 Flavor(맛)로 느껴진다. 문제는 항상 긍정적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긍정이는 부정이를 긍정적으로 껴안아 보듬어주는데, 부정이는 긍정이를 부정적으로 끌어당겨 옥죈다.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서 즐거움을 쫓는다. 확실한 건 노력하지 않으면 즐기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즐길지 말지를 정할 수 있다. 그 방향이 정해지면 그걸 취향이라 부르고, 그 깊이가 더해지면 취미라 부른다. 그걸로 돈을 벌 정도가 되면 직업이 되는 거지만, 그 정도는 바라지 않는다.

요새는 판소리가 좋아졌다. 판소리를 들을 때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진한 에너지에 눈물이 흐를 때가 많다. 정작 그 가사는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 에너지만으로도 순간 날 잊을 수 있었다. 여러 명창이 계시지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듣는 김소희 명창의 뱃노래 또한 추천한다. 그리고 음악 그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가능하다면 영상으로 보면서 표정과 떨림,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느껴보길 바란다.
저번 여행지였던 생존에 이어서 이번 여행지인 판소리가 마음에 든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