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깨진 거울의 조각을 줍다

by 감성소년


제1장: 얼룩진 유년, 소주 냄새 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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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수아의 코끝에는 늘 비릿한 소주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버지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는 곧 재앙의 서막이었다. 비틀거리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두 남동생을 장롱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년아, 돈 내놔! 내가 네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아버지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부엌에서 들리는 그릇 깨지는 소리와 어머니의 낮은 비명. 수아는 장롱 문틈으로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는 짐 가방도 없이 집을 나갔다. 아니, 도망쳤다는 표현이 맞았다. 수아는 원망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들까지 데려가지 않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까지 시린 한기로 남았을 뿐이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는 수아의 멍으로 채워졌다. 아버지는 화풀이 대상을 수아로 바꿨다. 매 맞은 자리가 욱신거려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수아는 천장을 보며 다짐했다.


'스무 살만 되면, 이 지옥에서 한 걸음도 남김없이 달아날 거야.'




제2장: 독사라 불린 여자, 홀로서기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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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생일날, 수아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과 미리 싸둔 배낭 하나를 메고 집을 나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동생들에게는 "내가 먼저 자리 잡을게. 조금만 견뎌."라는 쪽지를 남겼다.


대학 생활은 낭만이 아닌 전쟁터였다. 수아는 별명이 '독사'였다. 아침엔 편의점, 낮엔 전공 수업, 저녁엔 과외 3개를 연달아 뛰었다. 잠잘 시간조차 아까워 편의점에서 폐기 식품을 씹으며 전공 서적을 외웠다. 친구들이 미팅을 가고 축제를 즐길 때, 수아는 신촌과 강남의 골목을 누비며 돈을 모았다.


그녀를 움직이게 한 건 아버지에 대한 혐오였고, 어머니에 대한 결핍이었다.


"난 절대 그들처럼 살지 않아. 비참하게 지지 않을 거야."


졸업식 날, 수아는 학사모를 쓰고 홀로 서서 눈물을 삼켰다. 동생들은 이미 수아가 보낸 돈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어엿한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었다. 하지만 밤마다 꿈속에서는 여전히 술 냄새 나는 아버지의 손이 목을 조여왔다. 트라우마는 그녀의 화려한 커리어 뒤에 숨어있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제3장: 사랑이라는 치유, 그리고 마주한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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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아의 닫힌 마음을 연 건 직장 동료였던 '민우'였다. 민우는 수아의 냉소 뒤에 숨겨진 떨림을 알아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수아 씨, 당신의 과거가 당신의 미래를 결정하게 두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민우의 따뜻한 지지 속에 수아는 생전 처음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온기를 느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했고, 수아는 마침내 자신의 성을 쌓았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혼 가구를 보러 시장 근처를 지나던 수아는 낡은 리어카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땟구정물 흐르는 낡은 점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빈 소주병을 줍고 있는 남자.


"아... 아버지?"


수아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상의 전부를 파괴할 것 같았던 포식자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뼈만 남은 비참한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수아의 가슴 속에서 혐오와 연민이 거세게 충돌했다.





제4장: 증오의 종말, 용서라는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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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는 며칠 밤을 꼬박 설쳤다. 그를 다시 만난 건 재앙이었다.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왜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서 나를 또 괴롭히나' 싶은 원망과 '그래도 내 아버지인데'라는 실낱같은 연민이 밤마다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수아는 다시 그 골목을 찾았다. 노인은 추운 날씨에 웅크린 채 낡은 박스 위에서 졸고 있었다. 수아가 다가가 따뜻한 캔커피 하나를 내밀자, 노인은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뉘... 뉘신가?"


그는 자신의 딸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다. 그 순간, 수아는 깨달았다. 그를 미워하며 살았던 지난 시간 동안, 가장 고통받았던 건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을. 그를 용서하지 못해 스스로를 증오의 감옥에 가둬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아야... 내 딸 수아냐?"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노인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아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으려다 자신의 더러운 손을 보고는 얼른 거두었다. 그 작은 몸짓에서 수아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미안함'을 읽었다.


"아버지, 이제 그만 가요. 우리 집으로."


그것은 아버지를 위한 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과거를 비로소 놓아주겠다는, 수아 자신을 향한 선언이었다.






제5장: 에필로그 - 깨진 거울 너머의 눈부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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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는 아버지를 요양 병원에 모시고 치료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수소문한 끝에, 지방의 한 작은 사찰 근처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냈다.


20년 만에 마주한 어머니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듯 주름이 깊었지만, 수아를 보는 눈빛만은 20년 전 그날처럼 애틋했다.


"미안하다, 수아야. 너희들을 두고 가서 정말 미안해."


"아니야, 엄마. 엄마라도 살아서 다행이야. 이제 우리 같이 살자."


수아는 어머니를 꽉 껴안았다. 어머니의 품에선 그토록 그리워했던 분 냄새와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이제 수아의 아침은 더 이상 소주 냄새로 시작되지 않는다. 창가로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 주방에서 들려오는 민우의 활기찬 목소리, 그리고 가끔 찾아오는 동생들과 어머니의 웃음소리.


수아는 거울을 보며 웃었다. 거울 속에는 더 이상 상처 입은 어린 소녀가 없었다. 대신, 자신의 아픔을 용기로 바꿔 세상을 안아줄 줄 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수아의 삶은 이제 막 가장 찬란한 전성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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