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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지우 Dec 24. 2020

그래도 버터는 필요해

    마지막으로 직장생활을 했던 서교동은 골목 곳곳에 작은 카페와 베이커리가 즐비한 동네이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커피, 고소한 버터향 머금은 크루아상, 입에 넣기 아까울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카롱과 다쿠아즈, 쿠키, 스콘은 점심 먹고 돌아오는 길에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도 또 먹게 만드는 마성의 매력을 가졌다.

버터 없는 생활 한 달째, 나에게 심각한 스콘결핍증이 나타났다. 고소하고 풍부한 버터향과 바삭하면서 촉촉한 식감, 커피나 홍차에 곁들이면 순식간에 행복해지는 마법의 디저트, 다른 어떤 디저트보다도 평범한 플레인 스콘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책 ‘월든’에서 그는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2년여간 호숫가에서 자급자족하면서 ‘가진 것에서 만족하고 행복을 찾는 여유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많은 깨달음을 주는 나의 인생책 중 하나이다. 하지만 소로우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오늘 버터를 욕망해야겠다.

박력분, 버터, 베이킹파우더, 달걀, 우유, 설탕, 소금. 서울에서 취미로 베이킹클래스도 들었고 집에서 때때로 만들기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재료는 다 있었다. 버터를 구하는 과정에서 조금의 품이 들긴 했지만 이틀 만에 원하는 버터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차갑게 냉장 보관한 버터를 잘게 잘라서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우유에 계란을 풀어 계란물을 만들고 마찬가지로 냉장고에 넣는다. 밀가루와 베이킹파우더를 곱게 채에 거르고, 설탕과 소금을 넣는다. 차갑게 보관한 버터를 넣고 주걱으로 섞어주는데 이때 버터를 잘게 잘라 밀가루와 보슬보슬하게 섞어준다. 손을 쓰면 버터에 온도가 전달되어 녹기 때문에 손은 가급적 쓰지 않는다. 잘 섞인 반죽에 만들어 놓은 계란물을 넣고 뭉쳐준다. 몇 번 치댄 반죽은 랩으로 싸서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어 냉장고에 넣고 한 시간 정도 휴지 시켜준다. 휴지가 끝난 반죽은 원하는 모양으로 자르고 윗부분에 계란물을 살짝 발라준다. 180도에서 20분가량 구워 주면 완성이다.

스콘을 한입 먹는다. 풍부한 버터맛이 혀를 자극하고, 바삭하면서 묵직한 식감이 기분 좋은 포만감을 준다. 거기에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느껴지고, 쌉쌀한 맛은 다시 스콘 한입을 부른다. 이렇게 먹으면 끝도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혹시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건 아닐까? 내 앞으로의 인생이 더없이 힘들고 고단 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고민으로 가득 찼던 하루 끝에 고소하고 달콤한 버터 향기가 위안을 주는 순간이다.


    모두가 걷는 길에서 나 홀로 벗어났다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든다. 반대방향의 지하철에 탑승했던 때처럼, 외국에서 길을 잃어버렸던 때처럼. 이대로 내가 모르는 곳에서 영영 떠돌게 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랬듯 해답을 찾을 것이다. 다음 역에서 내려 옳은 방향으로 다시 타면 되고, 미아가 된 외국인의 불안한 눈빛을 본 행인의 친절로 길을 찾기도 할 것이다. 아직은 다음 역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 과정에 얼마나 길고 고될지, 혹은 찰나의 순간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다음 역까지 가는 과정에서도 행복을 찾고 위안을 얻으며 버텨가면 된다.


    그래서 버터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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