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젠토 가까운 곳에 옛 로마 귀족의 저택 터가 있다. 정식 이름은 빌라 로마나 델 카살레 (The Roman Villa of Casale)이다. 약 17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로 17세기에 그 잔해가 처음 발견되었고 20세기에 와서야 정식으로 보존되었다. (3세기말에서 5세기 초기에 그려진 1기 고구려 고분벽화와 시기가 비슷하다.) 건물은 목욕탕 구조물과 수도교 자취만 겨우 남아있고, 도굴의 흔적이 많아 오로지 바닥의 모자이크화만 풍성하다. 위쪽으로 설치된 지붕이나 관람용 데크는 모두 근래의 것들이다.
바닥의 모자이크는 기하학적 문양이나 다양한 삶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붓으로 그린 그림처럼 보이지만 아주 작은 다채로운 돌을 이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고상한 색채를 드러내고 있다. (좀 희미해졌지마는)
50m 정도의 복도 바닥에 장대하게 펼쳐진 대사냥의 스케치가 있다. 멧돼지, 사자, 표범등과 창을 투척하는 사냥꾼을 현란한 색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귀족의 복장과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를 생생히 엿볼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실어온 코끼리를 끙끙거리며 배에서 실어 내리는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뜻밖에 만난 비키니 차림의 소녀들 모자이크화다. 그 시대의 운동복이라고 하는데 요새 스타일과 비슷해서 짐(gym)에서 금방 나온 모습 같다. 아령 들고 걷기, 구기 운동, 원반 던지기, 달리기 등을 하고 있고 한쪽에는 승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려는 듯한 여성이 보인다. 요즈음 해변에서 비치 발리볼 하는 여학생 포즈와 다를 게 없으니, 이 모자이크를 보고 비키니를 고안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때는 문명이 거꾸로 가는 것처럼 옛것들에서 요즘 최신 유행하는 패턴을 본다.
이 저택의 중심인 바실리카는 그림으로 재 구성해 놓았다. 공식적인 업무와 연회장으로 쓰인 홀인데 웅대한 두 개의 기둥과 대리석 바닥 일부만 남아있다. 빌라 로마나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저택의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중앙 권력자로 추측한다. (어떤 시기에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소유였을 것이라고 하고, 가옥이 붕괴된 후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에 의해 기원후 300년경 다시 건설된 것으로 본다.)
어떤 방에서 주인에게 음식을 바치는 종들의 그림이려니 하고 사진을 한 장 급하게 찍고 지나갔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찬찬히 소개글을 읽을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책자의 설명을 읽어보니『오디세이』
의 한 장면을 그린 거였다. 그것도 거인 퀴클롭스 섬의 동굴에서 우두머리 폴리페무스에게 포도주를 권하는 오디세우스 일행의 스케치이다. 내가 브런치 연재북에서 그토록 언급했던 장본인 폴리페무스의 등장이라니! 그는 허벅지에 포획한 수양을 걸쳐 놓고는 있으나 턱수염을 한 얼굴이 호메로스가 묘사하듯 포악하거나 탐욕스럽지 않다. 확대한 사진에서는 오히려 오디세우스를 호기심 어린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그란 세 개의 흑갈색 눈동자가 내게도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브런치에서 내 이야기를 많이 했잖소. 이번엔 내 얼굴도 좀 발행하시오."
주인이 사용한 작은 목욕탕/ 물을 데우는 욕장 구조물
Tepidarium (로마식 목욕탕의 따뜻한 욕실)
세 눈의 퀴클롭스 폴리페무스의 근접 모습 (안내 책자)/ 안주인 방의 에로틱 장면 모자이크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