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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램즈이어 Jun 03. 2023

에드워드 호퍼의 고백

전시 <길 위에서> 삼천포로 빠지다

 <에드워드 호퍼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는 스토리텔링: 픽션>

<푸른 저녁>

 코렐리 씨에게 우리의 파리생활 추억이 담긴 그림 <푸른 저녁>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 부부와 우리의 친지들이 등장하는 스케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한마디 나직이 내뱉었다.

"사람을 그린게 아니라 직업을 그렸군." 오른쪽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 뒷모습과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각 인물들의 내면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의 불만은 매춘부의 얼굴 묘사였다.

"그 직업의 여성이 오히려 고결할 수도 있는 거죠. 어떤 이의 정숙한 아내가 그 반대일 수도 있고."

 그 그림에서는 일부러 다양한 인물(직업) 군상의 특징을 담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일일이 대꾸하진 않았다. 그의 비평으로 파리에서의 어느 여성이 떠올랐고,  '어떤 이의 정숙한 아내' 부분이 신경 쓰였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많이 어린 발랄한 미인이지만 꽤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다. 코렐리 씨가 돌아간 후 나도 모르게 파리생활의 추억에 잠겼다. 우리의 문예부흥 시절, 세 사람 모두의 관심이던 마리…. 코렐리 씨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변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파리 생활을 마냥 부러워하다가 따라나선 친지 중에 주류 밀매업자 A가 다. 표면적인 이유는 유명 와인 업체와 거래를 트는 것이지만 속마음은 사교계의 멋진 파리지엔느를 만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여인데이트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류계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달린…. 그의 부유함으로 어느 미인을 낚았나 보다 생각했다.

 몇 달 후엔 나의 오랜 친구 코렐리 씨가 합류했다. 그가 파리에 온 이유는 부동산 업자로서 쓸만한 물건을 찾는 것이었는데 사실은 호기심 많은 젊은 아내가 부추겨서 온 것 같았다.

 우리와 코렐리 씨 부부는 자주 어울렸지만 A 커플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나의 내성적 성격 탓에 우리 부부 스케줄은 거의 아내가 알아서 짠다. 아내가 일부러 A 커플과 엮이는 것을 피했을지도 모르겠다.

 코렐리 씨 커플이 우리 보다 먼저 A와 마리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오페라 극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한다. 그 후 두 커플은 종종 만나는 것 같았다. 코렐리 씨와 A는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었으나 파리에서 만난 고향 사람으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했으리라. 우리 세 커플은 딱 한번 식사를 함께 했다. 그날의 만남을 잊을 수 없다. 뜻밖에 마리는 무척 청순한 모습이어서 그녀의 뒷담화를 모두 잊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녀의 성품과 예절은 고귀함이 넘쳐 그 무성한 부정적인 소문들이 사람들의 질투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문득 마리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싶었다. 고야의 모델 마야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신비로움은 더할 것 같았다. 나의 모델이 되려면 아내와 상의를 해야 하므로 갈망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코렐리 씨는 나보다도 더 마리에게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떤 연민과 동경이 섞인 것 같은 묘한 시선이었다. 그의 어린 아내도 그렇게 느꼈는지 그 후론 두 커플이 자주 만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랑오귀스탱 강둑>

 파리 생활 마지막 즈음 마리를 한번 더 본 것 같기도 하다. 강가를 산보하고 있던  여인의 모습이 그녀인지 백 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랑오귀스탱 강둑을 스케치하고 있을 때 짙은 푸른빛 모자와 긴 드레스의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금세 고개를 돌리고 총총히 가버렸지만 세련된 파리지엔 모습을 다리 쪽 구도에 넣을 뻔했다.

<카페 테이블에 앉은 남자들>

 우리 부부가 파리를 떠나기 얼마 전 A가 남자 셋만 좀 보자고 했다. 우리는 카페에서 꽤 밤늦도록 마셨다. A의 고민은 마리에 대한 것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마리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것, 그녀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녀랑 결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코렐리 씨와 나는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그녀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열렬히 충고했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게 나는 마리가 누구의 부인이 되는 것이 싫었다. 눈치로 코렐리 씨는 나보다도 더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의 뒤를 이어 코렐리 씨와 A 커플이 미국으로 돌아왔다. 마리는 A 부인이 되었다. 미국에서 우리 부부는 A 커플을 본 적이 없다. A 부부에게서 온 식사 초대가 내 스케줄을 담당하는 아내 선에서 잘렸는지 모른다. 아내는 종종 주류밀매업을 하는 A의 직업이 못 마땅하다는 언질을 했다. 마리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었고.  코렐리 씨가 가끔 그녀 이야기를 했다. 혼자서 종종 그 집을 방문한다면서, 낯선 곳에서 마리의 술 의존이 심해졌고 얼굴이 상했다며 안쓰러워했다. 어느 때는 꽤 늦게까지 그 집에 머무르는 듯했다. 정원에서 마리의 방을 훔쳐보는 코렐리 씨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고 그녀의 우아한 얼굴이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밤의 창문>

 그날 새벽 오전 7시에 코렐리 씨에게 전화가 왔다. 급히 A의 집으로 와 달라는 거였다. 마리가 위급하여 일손이 필요하다면서. 그녀의 응급상황도 뜻밖이었지만 꼭두새벽 그 집에 코렐리 씨가 있는 것도 놀라웠다.

<오전 7시>

  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구급대가 이미 모두를 싣고 떠난 모양이었다. 검은 숲을 배경으로 하얀 집이 묘한 적막에 감싸여 있었다. 현관 옆의 괘종시계만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손님을 맞이했다.

 병원에서 A와 코렐리 씨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창백한 얼굴이었다. 전날 밤 세 사람은 밤늦게까지 함께 카드놀이를 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다음날 일찍 두 사람이 바다낚시를 떠나기로 해서 코렐리 씨는 그 집에 묵었다. 출발 전 A가 아내에게 인사하러 그녀 침실에 들어갔을 때 (마리는 불면증이 심해 전용 침실에서 따로 잔다고 한다.) 축 늘어지고 숨소리가 희미해진 모습을 발견했다. 알코올과 약물 과다 복용.

 병원의 정원 벤치 가까이서 철로가 보였다. 철길 위 석양이 그날따라 현란한 색조를 띠었다. 시시각각 색이 변하는 구름을 바라보며 코렐리 씨와 나는 답배 연기만 거듭 내뿜었다. 그의 표정도 서쪽 하늘만큼이나 시시각각 달라졌다. 어둑어둑해지자 가장 궁금한 질문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마리를 사랑했나요?"

"에에? 사랑이요? 아…. 그래 보였나요?"

"아니. 그냥…. 그동안…."

"…. 만약 제게서 마리를 향한 어떤 감정이 보였다면…. 그건 순전히…. 제 누이 때문이랍니다."

 그는 씁쓸함과 슬픔이 담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복 여동생과 어려서 잠시 함께 살았던 이야기, 어느 날 누이의 친어머니가 나타나 데려가 버린 것, 그들이 프랑스로 건너갔다는 소문, 누이의 어머니는 행실이 좋지 못하다는 것, 가난했던 모녀가 파리에서 어떻게 생활을 해나갔을지 상상 속에서 늘 마음 졸여 왔다고 했다. 마리를 볼 때마다 누이의 모습이 투영되어 자기도 모르게 경계를 허물고 가까이 다가갔다며.

 코렐리 씨는 A와 함께 마리의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을 어떻게 해서든 고쳐내려고 했다. 이기적이고 돈벌이에 팔려 있는 A의 성품으로 보건대 미국에서의 마리는 거의 코렐리 씨가 돌본 것 같았다.

<이층에 내리는 햇빛>

 마리의 장례식이 끝났다. 우리는 모두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표현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다. 마리는 저 세상으로 떠났고 그녀의 부재는 세 사람에게 파장을 남겼지만 두 가정은(나와 코렐리 씨) 겉으로는 여전히 탄탄해 보였다.

 코렐리 씨는 우리를 자신바닷가 별장으로 초대했다. 그곳은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숲 속의 이층 집이다. 점심을 함께 들고 오후에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밝은 공기 속으로  바람이 나무향과 짠내음을 실어왔다

 햇빛 치는 발코니에서 코렐리부인은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채 일광욕을 하고 있다. 코렐리 씨는 먼바다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하다. 잡지 읽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

 나는 스케치를 하고 습작노트를 적는다. 아내 조는 내가 사준 채양 모자를 쓴 채 해변에서 먼바다를 그리고 있다.


<굿하버 해변에서 스케치하는 조>


P.S. 1. 글을 다 적고 나서 보니,  <이층에 내리는 햇빛> 속의 잡지를 들고 앉아 는 사람이 여성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처음 봤을 때 남성으로 인식했습니다.

       2. 실제로는 에드워드 호퍼의 파리 체류는 결혼 전 20대 후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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